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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디펜스타임즈

전사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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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 패튼 (1)

  시작하며

  1960~80년대는 밀리터리 매니아들에게 있어 최고의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대규모의 전쟁영화들이 잇따라 개봉하던 시기였다.


  구소련에서는 워낙 선전고무 전략에 입각한 다양한 독소전 영화들이 제작되어 개봉되었고 특히 나폴레옹 전쟁 시기를 소재로 한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 4부작( 1965~1967, 보로디노 전투씬 촬영에만 소련군 13,000명이 엑스트라로 동원되었다 )은 물론 2009년에 언급한 바 있는 유럽의 해방 5부작( 1968~1971 ) 등은 물량이나 규모 면에서 서방 측이 따라잡기 어려운 수준을 보여줬을 정도였으니 이에 대응하는 서유럽이나 북미 역시 그에 못잖은 블록버스터가 대량으로 제작되었다.

 

  그 중 스페인 육군과 공군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3대 명작( 발지대전투, 영국 본토 항공전, 패튼 대전차군단 )은 지금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가장 화끈한 영화가 아닐 듯 싶다.

 

  정확한 고증이야 훗날 88 랜드로버에 플라스틱제 사출 덮개를 씌우면서까지 어떻게든 고증을 맞춰보려 노력한 머나먼 다리( 1977 )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처럼 대규모의 전차들이 굴러다니며 전차를 통째로 폭파시키거나 불태우기까지 하는 화끈한 전투장면과 박력이 넘치는 각도 연출은 오늘날 CG로 도배질하다시피하는 영화에서 볼 수 없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특히 3대 명작 중 한 개인의 일대기를 집중조명하다시피한 패튼 대전차군단( 1970 )은 172분의 상영시간이 지루하다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우수한 스태프(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까지 참여했으니 )와 조지.C.스콧/칼 말덴/파울 라우히 등 연기파 배우들의 열연, 그리고 스페인군의 지원을 받아 대규모로 투입된 장비 등 화려한 볼거리와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라 하겠다.

 

  다소 아쉬운 점은 패튼을 소재로 하면서도 정작 영화에서 다루는 부분은 그가 북아프리카의 제2군단장으로 부임하는 시점부터 시작한다는 것으로 만약 그의 웨스트포인트 생도 시절부터 다뤘다면 좀 더 재미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물론 그렇게 하자면 거의 50부작 미니시리즈로 제작되어야겠지만 미국의 여건 상 일본이나 우리처럼 50~100부작으로 제작하는 경우는 거의 드문 만큼 여기에서는 본작의 간단한 소개 못잖게 영화 상에서 다루지 않은 패튼의 일대기도 살짝 추가해 구성하기로 했다.

 

  문제는 패튼의 일대기를 다루자면 거의 단행본 수준의 분량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우선 이번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패튼의 유년기를 집중적으로 다뤄보도록 하겠다.

 

  영웅의 탄생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의 장교와 부사관들은 패튼 중장을 현대전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자신에게 필요한 무기체계를 적시에 활용할 줄 아는 장성으로 평가했다.


또한 종전 이후 독일 국방군의 후예 서독군 및 독일 연방군은 “패튼은 진정한 기동전의 명수였다.


그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와 오마 브래들리로부터 보다 폭넓은 재량권을 받았다면 전쟁은 1944년 11월 즈음에 끝났을 것이고 T-34가 아닌 셔먼이 베를린 거리를 활보했을 것이다.” 

 

  이것은 아마 적국이었던 독일 못잖게 혈기왕성한 청년들에게도 딱 그러한 인상을 줄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인 미국인들의 일반적인 평가는 어떠할까?

 

  여러분들에게는 다소 유감스러운 일이겠지만 패튼 중장에 대한 미국인들의 반응은 이와는 정반대에 가깝다.

 

  종전 74주년을 맞는 현 시점에서도 미국인들에게 있어 패튼 중장은 남부 귀족 출신의 저속하고 허풍이 심하며 틈만 나면 병사들을 구타하고 상관의 명령을 상습적으로 무시해 언론의 구설수에 오르락내리락하는 악질 장성으로 보는 편이 높다.

 

  특히 전쟁의 결과가 미국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애써 부인하고자 하는 미국 시민들에게 패튼의 호전적인 경향은 되려 큰 이질감과 당혹감만을 자아낼 뿐이었다.

 

  즉, 패튼을 존경까지는 해줄 수 있어도 본받을만한 위인으로 볼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얘기다.
  이렇듯 적과 아군 사이에서 매우 상반된 평가를 받는 조지 스미스 패튼 주니어의 일생을 한번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은 결코 시간 낭비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1885년 11월 11일, 캘리포니아주 레이크 비니어드에서 출생한 패튼 주니어는 여느 미국인들과 달리 상당히 독특한 가정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그의 조상은 1769년, 신천지를 찾아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한 스코틀랜드인이었고 이후 버지니아주의 프레데릭스버그에 정착한 뒤 상인으로 큰 성공을 거두며 부를 거머쥐었다.

 

  이후 이 부를 바탕으로 자신보다 계층이 높은 여성과 결혼하는데 성공하며 여러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 한명이 바로 존 패튼이었고 무려 9명의 아들 중 4명을 버지니아 군사대학에 입학시키며 무관가문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1861년, 버지니아주가 남부연방에 가담하며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패튼 일가는 셰넌도어 계곡으로 이주한 뒤 남군으로 입대해 북군과의 격전에 투입되었다.

 

  남군에 입대한 패튼 일가는 무려 16명으로 이 중 1864년 윈체스터 전투에서 사망한 조지 패튼 1세( 패튼 중장의 조부, 1833~1864 )를 포함, 3명이 전사했다.

 

  1865년, 전쟁이 북군의 승리로 끝이 나자 패잔병이 된 패튼 일가는 자급자족으로 하루 하루 연명하는 신세로 전락했지만 다행히 전쟁 전 캘리포니아주로 이주한 덕분에 참전을 면했던 처남이 미망인이 된 여동생 수잔에게 이주를 권고하며 당시로서는 쉽게 벌기 어려웠던 600달러의 거금을 이주비용으로 송금해오는 파격적인 일이 벌어졌고 이 이주는 훗날 조지 패튼 중장의 탄탄한 기반을 다져주는 계기가 되었다.

 

  1869년, 조지 패튼 1세의 사촌이자 죽마고우였던 조지 스미스가 버지니아에서 로스엔젤레스로 이주해 왔는데 그는 조지 패튼 1세의 미망인인 수잔을 워낙 오랫동안 사랑해왔던 터라 이주 후 당당하게 청혼을 했다.

 

  오랜 고생으로 병약한데다 자녀가 4명이나 딸려있던 수잔은 이 청혼을 받아들였고 1870년 두 사람은 정식으로 결혼했다.

 

  조지 스미스는 매우 모범적인 계부( 繼父 )였고 의붓아들 조지 패튼 2세( George Smith Patton Ⅱ, 1856~1927 )에게 윈체스터 전투에서 전사하기 전까지 친부( 親父 )가 펼친 활약상과 무용담, 그리고 고결한 인품 등을 자주 전해주었다.

 

  이렇게 평온한 분위기에서 성장한 조지 패튼 2세는 친부의 뒤를 이어 버지니아 군사대학에 입학했고 생도 가운데 두각을 드러냈다.

 

  졸업 이후에는 동부에 터전을 잡으려했지만 급격히 악화된 수잔의 건강 때문에 로스엔젤레스로 복귀했다.

 

  그의 복귀에는 단순히 생모의 간병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보수적이고 답답한 버지니아주보다는 개방적이고 도전적인 캘리포니아주의 분위기를 더 갈망했던 영향이 컸다.

 

  이후 캘리포니아주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조지 패튼 2세는 재판장을 쩌렁쩌렁 울리는 고성과 강한 설득력이 미덕으로 여겨졌던 해당 지역에서 웅변가의 소질을 보이며 명성을 쌓았고 이를 기반으로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집안과 사돈 관계를 맺는 패튼 집안의 내력을 계승해 1884년, 캘리포니아주에서 가장 저명한 가문인 윌슨 가문과 혼담을 나눈 끝에 벤자민 데이비스 윌슨의 딸인 루스 윌슨( Ruth Wilson, 1861~1928 )과 결혼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85년 11월 11일, 레이크 비니어드에서 장남이 태어나니 바로 조지 패튼 중장이었다.

  조지 패튼 2세는 아들의 이름을 조지 스미스 패튼 주니어( George Smith Patton. Jr )로 명명했고 이 역시 가문의 혈통을 이어가는 방침이었다.

  비교적 부유한 가정환경 덕분에 유년 시절의 패튼 주니어는 남부럽지 않은 삶을 누릴 수 있었고 특히 대대로 무관가문이었던 이력 덕분에 친척과 친구 외에도 남북전쟁 당시 조부의 전우이자 남군으로 참전했던 많은 이들이 북적였다.

 

  이러한 주변 환경은 지극히 소수로 이뤄진 가정에서 성장할 경우 엉뚱한 길로 빠질 수 있었던 위험에서 패튼을 구원해주었고 덕분에 다소 폭넓은 감성을 가지는데 도움을 주었다.

 

  특히 15년에 걸친 집안 싸움에 휘말렸다가 파산하여 간간히 버티게 된 아버지 조지 패튼 2세는 아들에게 수시로 남북전쟁 당시 친부의 무용담이나 과거사를 얘기해줬고 조지 패튼 1세가 전사할 당시 사용했던 말 안장까지 얹은 말을 이용, 승마 교육도 시켜줬다.

 

  하지만 자녀의 교육은 신체와 지능의 발달에 따라 천천히 이수시켜야 한다는 조지 패튼 2세의 고집과 지독한 글맹이었던 한계로 인해 무려 11세가 될 때까지 정규 학교과정을 이수하지 못했는데 패튼에 관련된 많은 문헌들 중 가장 유명한 카를로 데스터의 저서를 보면 저자는 그가 난독증을 앓고 있었다고 확신할 정도라고 한다.

 

  반면 스탠리 허쉬슨의 경우 그가 난독증임을 입증할 근거가 전혀 없다는 반론을 펼 정도이니 이 시기 패튼에게 나름대로 문제점이 있기는 한 듯 싶다.

 

이러한 한계는 패튼의 유년 시절, 그토록 공부를 싫어하게 된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할 정도였다.

  어찌되었든 패튼을 정규 학교과정에 입학시키기로 결정한 조지 패튼 2세는 자그마한 시골 사립학교에 입학시켰는데 여기에서도 그의 글맹 및 오타는 변함이 없었지만 동년배들에 비해 탁월하고 힘이 넘치는 문장력과 특히 군사적인 주제에 있어서는 누구도 따라올 이가 없었다.

 

  어떤 경우에는 책 한 권을 통째로 암기할 정도로 높은 기억력을 발휘할 정도였다 하니 그가 훗날 탁월한 군사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을 서서히 싹틔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02년, 17세의 나이에 졸업반으로 진급( 학교 늦게 들어간 덕분에 )하며 패튼은 자신의 장래 진로를 군인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는 개인의 선택일 뿐이었는데 당시 패튼 집안은 비옥한 토지와 결혼 정책을 통해 나름 궁색하지 않고 여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재력을 보유한 상태였다.
  당장 조지 패튼 2세부터 군인이 아닌 변호사의 길을 택할 정도였으니 패튼 주니어라고 굳이 군인의 길을 걸을 필요가 없었다.

  

2019년 10월30일 19시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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