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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디펜스타임즈

전사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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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 패튼(2)

이 시기 패튼은 남북전쟁 참전 용사이자 집안의 지기였던 보스턴의 프랑스계 신흥 재력가 프레데릭 아이어( Frederick Ayer, 1822~1918 )의 딸 베아트리스 아이어( Beatrice Ayer, 1886~1953 )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당시 패튼에게 중요한 것은 군인으로서의 성공이었다.


  이 때문에 미국의 저명한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 포인트에 입교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봤지만 그것은 번번히 실패로 돌아가기만 했다.

  웨스트 포인트에 입교하기 위해서는 지역 의원의 추천이 있어야 했는데( 훗날 영화 “위 워 솔저스”로 유명한 이 아 드랑 계곡 전투를 승리로 이끈 해롤드 무어 중령 역시 눈물겹게 이 추천을 받아 입교할 수 있었다 ) 조지 패튼 2세는 아들의 입교를 위해 찾아갔다가 되려 “좀 더 냉철한 안목으로 자녀 교육을 되돌아보라”는 냉소어린 충고만 받고 돌아와야 했다.

 

  더욱이 당시 패튼의 학업적 자질 역시 웨스트 포인트 입교에는 부적절했다.


  패튼은 늦은 나이에 정규 학교과정에 진학한 만큼 부단한 노력을 거듭한 끝에 대수학과 기하학을 성공리에 이수하고 콤플렉스였던 영작문도 훌륭하게 할 수 있었지만 독일어를 비롯한 가장 기본적인 외국어는 거의 배운 적도 없을뿐더러 프랑스어나 아랍어는 기대할 수도 없었다.

 

  특히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오타는 결정적인 걸림돌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설령 의원의 추천을 받더라도 어렵기로 정평이 난 웨스트 포인트의 입학 시험에 응시했다가는 100% 낙방이 유력했다.


  덕분에 일찌감치 웨스트 포인트 입교를 포기한 패튼은 가문과 연고가 깊은 버지니아 군사대학을 선택했다.

 

  1903년, 18세의 나이로 버지니아 군사대학에 입교한 패튼은 생도들 중에서 늘 으뜸이었고 상급생들의 호된 얼차려도 묵묵히 견뎌내며 점차 군인으로서의 자질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여기에 무관가문으로서의 평판에 따른 가족과 고향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굳은 신념이 패튼을 고된 교육훈련과 내무생활을 견뎌내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처럼 버지니아 군사대학에서의 성공적인 생활 와중에도 패튼은 웨스트 포인트 전학을 꿈꿔왔고 곧 그 기회가 다가오고 있었다.


  때마침 캘리포니아주 출신의 상원의원이자 조지 패튼 2세와 절친했던 토마스 바드가 그의 후원자가 되어준 것이 행운이 되었다.

 

  바드 역시 다른 의원들과 마찬가지로 웨스트 포인트 추천을 위한 후보생 선발시험을 치렀는데 여기에서 패튼은 16명의 지원자 중 1등을 차지했고 1904년 6월, 마침내 웨스트 포인트로 전학하는데 성공했다.

 

  비록 동기생들에 비해 나이가 많은( 요즘 우리 육군사관학교 평균 연령 차 2~3세는 패튼에 비하면 양반 수준이라 할 수 있다 ) 한계가 있었지만 그렇게 진입하기 어렵다는 입교의 문을 돌파하는데 성공한 패튼에게 있어 이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콤플렉스였다.

 

  일반적으로 1등, 2등 개념을 적용하는 우리 육군사관학교나 3사관학교와 달리 웨스트 포인트는 최저 학력인 4학년부터 시작, 1학년까지 진급해 졸업-임관하는 학년체계를 적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4학년 생도로 입교한 패튼은 여름에 실시하는 하계군사훈련을 별 탈없이 마치고 전체 신입생도 중 가장 키가 큰 편이라 제1 중대로 편성돼 우열 기준이 되었다.


  이미 버지니아 군사대학 시절 다져진 체력과 체격, 그리고 품위 덕분에 신입생도들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존재였던 패튼은 제복의 단추와 구두를 반짝거리게 닦아놓는 것은 물론 사열 시 ‘칼 줄’을 잡아놓아 상당히 튀는 이미지를 형성했다.

 

  요즘 군대에서도 이렇게 지나칠 정도로 ‘각’잡는 것을 모범으로 여기는 한편으로 너무 튀게 보는 경향이 큰데 당시에는 더욱 심했을 것이다.

 

  특히 패튼이 입교할 당시 웨스트 포인트의 분위기는 본인의 이상과는 상당히 이질적인 것이어서 버지니아 군사대학보다 다소 군기가 완화된 편이었다.


  따라서 버지니아 군사대학에서나 통용될 법한 패튼의 지나친 군기 및 빠른 기본 교육훈련 습득( 패튼은 소위 말하면 OJT에 가까운 경력자였다 ), 그리고 1학년을 방불케하는 제식동작은 오히려 역효과로 작용해 상당히 튀는 이미지로 왜곡되어 버렸고 여기에 4학년 생도 과정이 서로 친밀감을 형성하는 시기라는 점을 고려할 때 동기생들보다 월등히 많은 나이라는 콤플렉스까지 겹쳐버리면서 소위 말하는 “왕따”와 비슷한 대인관계를 형성해버렸다.

 

  하지만 이렇게 동료 생도들의 따돌림 속에서도 패튼은 동기생들 중 가장 빨리 장군으로 진급하겠다는 꿈을 꾸며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었다.

 

  문제는 앞서 여러차례 언급한 것처럼 패튼의 오타였다. 패튼은 동기생들 중 군사관련 및 교육훈련에서는 단연 월등한 실력을 발휘했지만 영어 철자를 틀려먹는 것은 여전했고 이 때문에 교수진은 특별지도를 통해 그의 실력을 향상시키고자 했다.


  강의실의 다른 생도들 사이에서 받는 스트레스도 큰 영향을 미쳐 패튼이 1904년 초 겨울에 조지 패튼 2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의 영어 관련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다.

 

  “저는 평범하고 게으르고 무능함에도 대망( 大望 )을 꿈꾸는 몽상가에 불과합니다. 아마 3류 소위로 전락해 소대 이상의 부대를 지휘하지 못하는 장교로 끝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영어를 제외한 나머지 분야에서 패튼은 발군의 재량을 드러냈고 특히 어린 시절부터 익힌 승마와 검술 실력 덕분에 육상 장애물 선수 및 펜싱 선수로서 맹활약을 펼쳤다.

 

  또한 반을 옮긴 것은 그에게 큰 성과로 작용해 12월 말의 기말고사에서 영어 과목을 무난하게 치러내는데 성공했다.

 


  특히 베아트리스 아이어와 관계 역시 급격히 좋아져 “난 아마도 상사병에 걸린 것이 틀림없어!”라고 자평할 정도였다.

  불운의 유급

  새롭게 전학한 웨스트 포인트에서 패튼은 일부 과목 성적에서 모범적이지는 않지만 착실하고 우수한 생도로서 성장해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때마침 불어닥친 교과과정 개편이 그에게 뜻밖의 불운으로 작용했는데 일의 발단은 교장인 알버트 레오폴드 밀 대령( 예비역 육군소장, 1854~1916 )이 과감하게 추진하려 했기 때문이다.

 

  특히 밀 대령은 교과과정이 과학과 수학 등 특정 과목에 지나치게 편중된 점을 지적하고 나섰는데( 오늘날 이공계 과목은 필수나 마찬가지지만, 특히 이스라엘의 경우 포탄과 장약의 제조-개발에 필수적인 화학과 물리를 대단히 중시한다 ) 이에 수학 과목을 담당한 정교수와 부교수진이 생도들의 수학실력이 다른 일반 대학생들의 평균치에도 미달된다면서 특히 1905년 기준으로 3학년 생도들의 경우 40% 가량이 심각하다는 점을 들며 반박하고 나섰다.

 

  문제는 당시 패튼의 수학 성적이 교수진이 강조하는 수준 미달에 가까웠다는 점으로( 이 아 드랑 계곡의 영웅 해롤드 무어 중령 역시 생도 시절 수학을 못해 화장실까지 책을 들고가며 공부해 가까스로 졸업시험에 합격했다는 눈물겨운 일화가 있을 정도니 ) 덕분에 그는 시기를 잘못 타는 바람에 3학년 진급을 못하고 유급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 어처구니 없는 유급으로 큰 충격을 받은 패튼 생도는 유급기간 동안 학업에 전념해 마침내 성적을 3등까지 끌어올리는데 성공했고 여전한 그의 생도로서의 용모, 규율 준수, 적극적인 자세 덕분에 상급생과 후임 생도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3학년으로 진급한 패튼은 4학년 생도들의 하계군사훈련에 조교로서 참가했지만 버지니아 군사대학에 버금가는 군기를 강요했다가 되려 가혹행위자로 낙인찍혀 보직해임되는 수모를 겪었다( 훗날 병사 구타사건으로 대부대[ 對部隊 ] 사과를 한 것은 이미 이 때부터 예견된 셈이었다 )

 

  하지만 2학년으로 진급한 뒤에는 학년 최고의 영예라 할 수 있는 생도대 선임 부사관으로 보임되었고 1918년 2월, 1학년으로 승급하기가 무섭게 장교 생도로 보임되어 연대 부관 생도가 되는 번개같은 출세를 거듭했다.

 

  이는 4학년 시절부터 꾸준히 유지해온 그의 군인 정신과 자세가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성공을 위해 끊임없이 공부를 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고 1학년이 되어서도 학교 도서관에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는데 특히 고대 전사( 戰史 )는 물론 각종 기술서적까지 독파했다.

 

  그리고 마침내 1909년, 웨스트 포인트를 졸업한 뒤 육군 소위로 임관한 패튼은 이미 내리막길을 걷고 있던 기병 병과를 선택했는데 이 때 그의 선택은 서서히 보병과 포병 병과가 주목받던 당시로서는 매우 시대착오적이었겠지만 훗날 전차가 전장의 주역으로 급부상하며 옳은 것이었음이 입증되었다.

 

   패튼이 갓 부대로 배치되던 시기 미국의 기병 병과는 상승일로를 거듭하고 있었는데( 유럽의 각국 기병 병과가 점차 축소되던 것과 대조적으로 ) 우선 보병 병과가 기존 25개 연대에서 30개 연대로 증강되는 동안 기병은 10개 연대에서 15개 연대로 더 늘어났고 전체 전력 중 30% 이상이라는 만만치 않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소위 임관과 동시에 일리노이 주의 제15 기병연대로 배치된 패튼 소위는 곧 오랜 연인 베아트리스 아이어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조지 패튼 2세와 프레데릭 아이어는 남군 출신 전우지간인데다 정치 토론 등 거친 언성을 높이면서도 매우 우호적이었고 특히 강력한 경제력이 있었기에( 하지만 패튼은 이를 그리 좋게 여기지 않았다 ) 딸 베아트리스 아이어는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영위했다.

 

  그런 그의 남편으로 경제력은 빈곤했지만 오랜 사관생도 생활로 다져진 체격과 큰 키가 무기였던 패튼은 잘 어울리는 베필이었다.

 

  더욱이 프레데릭 아이어는 직업군인을 사윗감으로 선호했기에 두 사람의 결혼은 여러 모로 봐도 자랑거리였음이 틀림없었다.


  마침내 1910년 5월 26일,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패튼과 베아트리스 아이어였지만 정작 군 당국에서는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명예에 비해 매우 쥐꼬리만한 월급( 이는 오늘날 어느 나라 군대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으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한편으로 갓 임관한 신출내기로서 다양한 업무를 습득해야 하는 패튼의 이중고는 상부에서도 곱게 보지 않았고 경제적인 문제는 재력가인 프레데릭 아이어가 매월 쥐어주는 막대한 양의 용돈( ?! ) 덕분에 해결할 수 있었지만 그 덕분에 군에서 지급하는 군마가 아닌 매우 몸값이 비싼 명마를 구입해 타고 다니는 패튼 소위( 아마 갓 임관한 소위들 중에도 집안의 경제력에 따라 ‘액센트’와 ‘에쿠스 VLS 500’을 몰고 다니는 경우를 비교해 보면 된다 )는 부러움과 동시에 질시( 嫉視 )의 대상이 되었다.

 

  여하튼 이러한 경제적 문제가 해결돼 업무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된 패튼 소위는 곧 그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중대장 대리로 승진했고 틈나는대로 프랑스 기병대의 전술논문을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수행하며 콤플렉스인 영어 실력의 향상에도 노력을 경주했다.

 

  또한 심도있는 기병전술과 이론을 공부하고자 상관들에게 캔자스의 미 육군 기병학교 교육파견을 건의했고 엉뚱하게도 웨스트 포인트의 생도대 훈육관으로 갈 생각( 누구 잡으려고? )까지 할 정도였다.

  하지만 웨스트 포인트 훈육관은 그의 사관생도 시절 지나칠 정도로 가혹한 조교 경력을 기억하고 있던 학교 측의 반발로 무산되었고 결국 버지니아주에 배치된 제15 기병연대 예하 대대로 전속되는 것으로 사태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는 좌천이 아니었는데 이 지역은 바로 육군참모총장 공관이 위치한 요충지였고 포토맥강의 건너편에는 바로 미국의 수도 워싱턴이 있었다.


  덕분에 패튼은 보다 넓은 황금인맥을 구축할 기반을 접하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는데 이 지역에서 그의 화려한 승마실력과 번쩍거리는 의상, 군인의 표상과도 같은 품위는 곧 지역 주민들에게 강인한 인상으로 남게 되었다.

 

  1913년 6월, 패튼은 보다 폭넓은 공부를 위해 프랑스의 소뮈르 기병학교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는데 이는 국비가 아닌 순수 자비 유학이었고 그 비용은 당연히 장인 프레데릭 아이어가 부담했다.

 

  든든한 장인의 금전적 지원 덕분에 그의 유학생활은 매우 순조로웠고 틈나는대로 옛 나폴레옹 시대의 전장터를 둘러보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기병 병과는 분명 시대에 뒤처지는 것이 분명했고 오랜 평화기간은 패튼에게 지루한 시기로 작용했다.


  허나 그 침묵기도 곧 깨질 분위기가 역력했고 곧 1914년이 밝아오고 있었다.
 

  

2019년 10월30일 19시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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