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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디펜스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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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 패튼 (3)

[ 고전 속 명작 ]

 

1차 대전의 패튼 대위

 

해설 : 유진우

 

  한 살 된 아이까지 친정 부모에게 맡겨가며 떠난 프랑스 유학 과정은 매우 순탄해 성공적으로 졸업을 할 수 있었다.
  이후 사라예보 총격사건을 계기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14년 8월 3일, 패튼 소위는 당시 육군 참모총장인 레오나르드 우드 준장에게 1년 기간의 청원 휴가를 신청했다.

  그는 개인자격으로 프랑스에 가서 전투에 참전하고 싶으며 만약 전황이 악화돼 독일군의 포로가 되더라도 결코 본국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할 정도였다.

  보통 사람같으면 “미친 놈” 정도로 혀를 끌끌 찰 정도의 과대망상 같아 보였겠지만 패튼의 주장은 허풍이 아니었다.

  이 무렵 패튼은 차녀 루스 엘렌의 출산과 더불어 중위 진급 시험평가까지 무난하게 합격하는 등 행복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전공을 세우고 싶어 안달이 나 있던 패튼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오고 있었으니 바로 1916년 3월, 멕시코의 유명한 산적 “판초 비야”가 국경을 넘어 뉴멕시코주 콜럼버스에 주둔한 미군 병력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윌슨 대통령은 즉각 토벌명령을 내렸다.

 

 

  토벌대장은 훗날 M26 전차의 별칭이 되는 <존 “블랙잭” 퍼싱 준장>이 임명되었는데 그는 당시 화재로 아내와 자녀들을 잃은 53세의 홀아비 신세였지만 워싱턴에 대단한 인맥과 정치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어 부유한 장인을 둔 패튼 소위조차 우러러 봐야 할 인물이었다.

  당시 패튼 소위가 소속된 제8 기병연대는 아쉽게 토벌대에 편성되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참전하고 싶어했던 터라 사전 면담 신청도 하지 않은 채 퍼싱 준장의 집무실로 바로 달려가는 모험을 감행했다.

  오늘날 군에서 이런 식의 돌발행동을 했다간 안 좋은 이미지로 찍히기 딱 좋았지만 느닷없이 들이닥친 패튼 소위를 바라보는 퍼싱 준장 앞에서 통신병이라도 좋으니 토벌대에 참가하겠다는 열의에 찬 모습은 강한 인상을 남겼다.

  다음 날 아침 퍼싱 준장이 전화를 걸어 준비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물어보자 패튼 소위는 이미 짐을 모두 꾸려놨으니 언제라도 출발할 수 있다는 답변을 했다.

  “거 참! 좋아, 자네를 내 부관으로 임명하지.”

  이렇게 단숨에 퍼싱 준장의 부관이 된 패튼 소위. 하지만 전시 상황에서의 부관 업무는 단순히 본업에만 충실하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평시의 부관이라면 단순히 상관이 쾌적하게 지낼 수 있도록 시중을 드는 선에서 끝나면 되는 것이지만 패튼 소위는 이를 벗어나 아예 사령부를 관리하고 행정적 업무까지 도맡아 함으로써 어지간한 일로는 쉽사리 감동하지 않는다는 블랙잭의 마음을 사로잡는 기염을 토해낸 것!

  반면, 패튼 소위 역시 정열적으로 부대 지휘에 매진하는 퍼싱 준장에게 큰 감명을 받았다.
  여기에 패튼 소위는 원정군 편성에 있어 예하 부대 지휘관들에 충분한 재량권이 부여되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며 훗날 자신의 부대 지휘 방침에 적잖은 타산지석으로 삼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파병을 결정한 윌슨 대통령의 지시는 멕시코와의 전면전이 아닌 단순한 정찰 및 치안 유지 임무에 불과했다.

 


  덕분에 파병 초기 <판초 비야>의 산적 및 멕시코 군과 일반 민중은 게릴라전 및 테러 등 비정규전으로 대응했고 특히 멕시코 북부 일대를 뒤적거리며 땀만 뻘뻘 흘리게 만들다 보니 미군 입장에서는 스타일을 구겨도 이만큼 구기는 경우가 없었다.

  여기에 미군을 더욱 심각하게 괴롭힌 것은 다름 아닌 점차 멕시코 내부로 진입할수록 병참과 통신 문제가 점입가경에 이른다는 점이었다.
  이 때문에 울화가 치밀어 오른 패튼 소위는 신분고하에 관계없이 멕시코인들 앞에서 폭언을 퍼부어 물의를 빚기도 했다.
  하지만 곧 패튼 소위가 진가를 발휘할 기회가 찾아왔으니 바로 1916년 5월 14일이었다.
  퍼싱 준장은 패튼 소위에게 병력 12명을 배속시켜 사령부의 군마들에게 먹일 곡물을 확보할 것을 지시했다.
  보통 같으면 군마로 이동할 일이지만 패튼은 보다 신속한 작전수행을 위해 차량 3대에 병력을 분승시켰고 곧바로 목적지로 쾌속주행을 거듭했다.

  사실 패튼 소위의 임무는 그다지 난이도가 높은 편이 아닌 대단히 싱거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이는 당시 돈 앞에서는 적과 아군의 구별도 모호해지는 전장환경이 낳은 혜택이라 할 수 있었다.
  제 아무리 조국을 침략한 미군이라고 하지만 돈 앞에서는 멕시코 상인들도 기꺼이 거래를 한 셈.

  그런데 부하들이 상인들과 거래를 하는 틈을 타 패튼은 일단의 병력을 인솔해 농장 일대를 샅샅이 수색했다.
  여기까지 오는 와중에 이 농장 일대에 판초 비야의 경호대장 도라도가 은신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기 때문.

  아니나 다를까 곧 도라도가 발견되며 양측 간에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총격전 과정에서 판초 비야의 경호대장 도라도와 멕시코인 2명이 사살되고 미군 측 사상자는 없었다. 그러나 이는 패튼 자신과 그의 열렬한 추종자들에 의해 구전된 것으로 오늘날까지도 진위 여부에 다소 논란이 일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교전 과정에서 사살된 멕시코인의 시체를 차량의 보닛 위에 얹어 퍼싱에게 바친 이는 다름 아닌 패튼 소위 본인이었다는 점이다.

  퍼싱 준장과 병사들이 경악하는 와중에 때마침 본사에 보낼 특종이 없어 무료하게 일상을 보내던 현지 종군 특파원들의 눈에 이만한 기삿거리가 없었고 특히 쌍권총을 휴대하며 마치 OK 목장의 결투로 상징되는 서부 시대의 카우보이를 연상케 하는 패튼 소위의 풍모는 스포트라이트를 받기에 충분했다.

  덕분에 일시적으로나마 패튼 소위는 산적 토벌의 영웅으로 대서특필되는 행운을 누렸고 이는 훗날 그가 팔레르모 탈환 과정에서도 유사하게 잘 활용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위로 진급한 패튼은 기병전술에 관련된 논문을 작성하는 한편 효율적인 기병 운용에 관해 퍼싱 준장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한편으로 극도로 시야가 나빠진 패튼은 안경 착용이 필요할 지경이 되었으니 그가 얼마나 바쁘게 살아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문제는 이 시기의 패튼 중위가 앞으로의 진로 문제로 적잖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당장 계급정년에 걸려 전역할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더딘 진급으로 인해 과연 동기생들 중 가장 빨리 “별”을 단다는 보장도 없었다.

  한편으로 윌슨 대통령의 전장 지휘 방식에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패튼 중위는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멕시코와의 전면전이 필요하고 대통령은 “겁쟁이”라고 비난하는 것을 서슴치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산적 토벌 임무 수행으로 무료한 일상을 보내던 1917년이 밝고 곧 4월이 되자, 마침내 패튼 중위에게 진정한 전장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마침내 윌슨 대통령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며 미군의 참전을 결정했기 때문!

  미군이 참전하게 된 배경에는 윌슨 대통령의 정치적 계산이 있었는데 표면상으로 중립을 표방하며 3년 동안 유럽을 지켜보는 와중에 그는 향후 세계 질서를 미국에 유리하도록 재편해야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특히 개전 직전까지 군사력 팽창에 열을 올린 독일이 만약 유럽을 지배하게 된다면 대서양이라는 장벽에 의존하는 미국의 국익에 적잖은 위협이 될 것은 자명했고 통상파괴 작전에 투입된 잠수함대의 활약 덕분에 그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하지만 막상 참전을 결정했다고는 해도 1917년 시점에서의 미군은 아주 미미한 존재에 불과했는데 우선 미 해군의 경우 주력함 건조에만 치중한 나머지 순양함이나 구축함과 같은 대 잠수함전의 주력이 취약하기 그지 없었고 따라서 윌슨 대통령이 원하는 힘의 재편을 위해서는 함대의 재편성이 필수였기에 이 분야의 강자 영국 해군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해군은 양반에 불과한 것이 실질적인 지상전의 주력이 될 육군의 사정이 더 한심했기 때문인데 1916년이 되어서야 간신히 총병력 10만명을 넘기는 수준( 108,000명으로 이는 1914년 당시 영국 육군 총 병력의 절반도 안되는 한심한 수준이었다 )에 불과함은 물론 기관총과 같은 중화기는 아무리 닥닥 긁어모아도 1,000정이 채 안되었고 그나마 대다수가 게틀링과 같은 1800년대 말의 유물이라 당장 병력이 필요한 영국과 프랑스 육군은 되려 안 그래도 부족한 자신들의 무기를 빌려줘야 할 판이었고 실제 참전 초기 미군 병사들이 영국제 루이스나 프랑스제 쇼샤, 호치키스 기관총은 물론 야포까지 지원받았던 사실은 매우 유명한 일이다.

  허나 무기 부족은 둘째치고 근본적으로 심각한 것은 참전이 결정되며 급속도로 증가하는 신병을 훈련시킬 교육대나 교관, 조교가 너무나도 부족했다는 점!

  각 주 방위군의 인원 부족은 둘째치고 새롭게 입대한 대규모 신병들을 수용할 기간시설조차 부족했는데 일례로 1918년 1월 시점에서 병사 3명 중 1명에게 총기와 장비를 지급하지 못하는 사단이 존재할 정도였다.

  그저 결정만 내리면 그만인 대통령 덕분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미국은 결국 대규모 공장제 생산방식을 채용해 신형 장비 및 총기의 대량생산에 돌입했는데 이 와중에 시도된 부품의 표준화 및 도면 공유는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요구했지만 훗날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미국이 승리하는데도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되었다.
  무기의 대량생산과 더불어 전국적으로 대규모 징집이 시행돼 1917년 5월에서 9월에 걸쳐 미국 전역에 병영과 막사가 신축됨은 물론 5만명이 넘는 신병이 입소하게 되었다.

  그리고 멕시코에서 산적 토벌을 통해 공을 세운 퍼싱 준장이 파병부대의 총사령관에 임명돼 무려 200만명이 넘는 병력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의 부관을 맡고 있던 패튼 중위는 마침내 무료한 일상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전장을 누빌 기회를 맞이한 셈이 되었다.
  하지만 유럽에 도착한 미군은 의욕은 충만할지 몰라도 훈련이나 실전경험, 장비 면에서 적잖은 열세를 보이고 있었다.

  유명한 영화 <로스트 바탈리온>을 본 분들은 잘 알겠지만 오랜 실전경험으로 단련된 독일군과 정면으로 붙는다는 것은 막대한 인명피해만 보장된 셈이었고 이들을 맨 처음 마주한 프랑스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프랑스군은 안 그래도 부족한 자국군의 장비 일부를 미군에게 공여하는 한편 미군의 작전 지역을 비교적 최전방보다는 안전한 로렌 지방에 할당함으로써 이 곳에서 우선 가장 기본적이라 할 수 있는 참호전에 관련된 각종 경험을 축적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 무렵 대위로 진급한 패튼은 비교적 최전선과는 차이가 있는 후방의 고성에 차려진 사령부에 머물며 프랑스 및 영국의 정치인 및 장성들과 교류하며 베아트리스 아이어를 프랑스로 데려올 계획을 수립하는 등 한가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정작 본인이 바라는 것은 피비린내 나는 전장이었지만 )

  특히 장인의 돈으로 구입한 12기통 고급 승용차인 “패커드”를 선박으로 실어와 몰고 다니는 등 당시 일반적인 육군 대위들이 엄두도 못낼 행동도 서슴치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전선을 수시로 시찰하는 등 실전에 대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퍼싱 준장이 사령부를 쇼몽으로 옮기자 패튼 대위는 행정업무로 잠시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지만 틈틈이 전장의 상황 및 보고서들을 살피며 점차 전장의 신무기로 떠오른 전차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요즘 이 곳에서는 전차에 관련된 대화가 자주 오가고 있소. 그리고 장교로서 내 장래성이 막막하다는 점에서 나는 전차에 적잖은 관심을 두고 있다오. 전장에서 많은 수의 전차들이 파괴됐지만 전차병들을 대체적으로 무사히 탈출해 복귀하고 있소. 당신을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전사하는 불상사가 있어서는 안되겠지만 그렇다고 사령부에 가만히 앉아 시간만 무료하게 보낸다는 것 역시 말이 안된다고 생각되지 않겠소?”

  패튼은 베아트리스 아이어에게 쓴 편지에게 이렇게 밝히며 점차 전장의 주역으로 가능성을 보이는 새로운 철갑기병인 ‘전차’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1916년 9월 15일, 영국군을 통해 솜 전투에서 첫 선을 보인 이래 독일군을 공포로 몰아넣은 전차는 마침내 1917년 11월 20일, 캉브레 전투를 통해 그토록 돌파되지 않던 철옹성이었던 독일군의 방어진지를 철저하게 유린하며 전선 돌파의 주역이 되기도 했다.

  이에 자극 받은 프랑스 역시 생 샤몽과 슈나이더를 투입시켰지만 워낙 둔중한 기동력으로 인해 독일군이 육탄공격과 야포 직사로 손쉽게 격파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당하고만 있을 프랑스군이 아니었기에 루이 르노의 주도로 1916년부터 개발된 신형 경전차인 르노 FT-17이 1917년부터 실전배치되고 있었다.
  첫 해에만 무려 84대라는 만만치 않은 수량이 납품되어 종전 시점까지 무려 2,967대라는 당시 전차로서는 최대 수량을 자랑하는 놀라운 생산성을 발휘한  FT-17은 그 때까지 보여준 생샤몽과 슈나이더가 떨친 악명으로 전차 무용론에 빠져있던 패튼 대위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비록 작은 차체로 인해 탑재할 수 있는 무장은 취약했지만 다른 전차들보다 높은 기계적 신뢰성 및 기동력은 기병장교인 패튼 대위에게 큰 인상을 주었다.
  여기에 고리타분한 전술에 질려있었던 퍼싱 준장 역시 전차의 연구에 흥미를 보였고 때마침 황달에 걸려 입원 중이던 패튼 대위에게 전차학교의 교관직이 제안되며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려 하고 있었다.

  만약 전차학교에서 새롭게 편성될 전차대대를 지휘해 공적만 세울 수 있다면 자신 역시 준장 진급에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갈 확률이 높았으니 말이다.
  결심을 굳힌 패튼 대위는 퍼싱 준장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자신이 휘발유 엔진에 정통하며 자동차를 타고 전투를 수행한 유일한 미국인임을 강조했다.

  특히 전차 무용론에 빠져있던 평소의 신념과는 다르게 이 전쟁에서 전차의 임무는 기병대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첨언할 정도였다.

  결국 1917년 11월 10일, 패튼은 전차병과로 전속돼 제1군 예하 전차학교의 창설 임무를 부여받는데 성공했다.

  비록 인맥을 통해 얻은 보직이었지만 그 때까지 전차에 대해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패튼 대위는 일단 프랑스군에 부탁해 르노 전차대대의 교육대를 견학했고 캉브레 전투 이후에는 영국군의 전차전 선구자인 풀러 대령을 방문했다.

  이렇게 하나하나 견학하며 빼곡하게 메모들을 작성한 패튼 대위는 이를 자신이 이룩한 최대의 성과로 자부했고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보병 지원을 받지 못한 전차는 무용지물에 불과하다”는 지독하게 당연한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전차의 장갑만을 믿은 일선 지휘관들은 전차를 단독으로 움직이는 것이 다반사였으니 패튼 대위의 견해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

  특히 적의 주 방어선이 와해되면 즉각 전차는 기병대의 임무, 즉 적의 완전한 소탕을 수행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히며 전선 돌파 및 전과 확대라는 기갑부대의 개념을 정확하게 정의해놓았다는 점이 주목할 대목이었다.

  패튼 대위의 이론은 정말 오늘날의 기준으로봐도 아주 완벽했지만 1918년 11월 11일, 휴전 시점까지의 그의 이론대로 수행된 전차전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2019년 11월19일 19시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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