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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 패튼(5)

[ 고전 속 명작 ]

 

패튼 대전차군단( PATTON ) -Act.4

 

해설 : 유진우

 

  패튼은 1920년 보병병과의 공식 잡지인 보병 저널( Infantry Journal ) 5월호에 전차부대의 독립 편성 및 독자적인 전술을 개발해야 한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패튼은 “전차가 보병에 흡수되면 전장에서 통제가 되지 않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고 마치 오리의 세 번째 발이 되는 격”이라며 강력하게 역설했고 11월호에는 아이젠하워까지 전차의 독립성과 역할을 강조하는 논문을 발표할 정도였다.
- 본문 中 -

 


  입장의 차이
  솜 전투를 통해 전차가 최초로 실전에 투입된 이래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군의 대전차 화기 및 집속 수류탄 등을 이용한 육탄공격에 효과적으로 맞서기 위해 꾸준한 연구를 했고 특히 2인승에 불과한 르노 FT-17에게는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특히 전차장이 전차의 기관총 사격과 표적 선정 및 사주 경계 등 다양한 임무( 구소련의 T-34/76과 같은 경우 전차장이 장전수 임무까지 수행했지만 이 때는 포수의 임무까지 겸직했으니 아마 그 스트레스가 더 심했을 것이다 )를 수행하느라 전차의 지휘는 꿈도 못 꾸던 시절에는 보병의 역할이 적잖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형에 따라 전진하는 보병은 무차별로 탄막사격을 퍼부어대는 독일군의 기관총 진지 앞에서는 무력하기 그지없었고 그나마 탄환을 튕겨내며 전진하는 전차가 알아서 적진을 돌파해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 문제였다.

 

  전차병들은 예나 지금이나 강력한 보병의 대전차 방어선을 의식해 가급적 정면으로 달려드는 것을 회피하는 경향이 강했고( 그로즈니에서 러시아 제131 기갑여단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던 바 있으니 ) 지난 장에서 언급했듯 당시 미군 전차병들은 보병과의 합동작전을 수행한 경험이 없었다.

  덕분에 전투 경험이 없는 제35 보병사단과 합동작전을 수행해야 하는 패튼의 비운은 이미 전투 개시 전부터 두드러진 셈이었다.


  특히 안 그래도 엉망진창인 전선에 더욱 혼란을 부채질하는 일이 발생했으니 바로 제35 보병사단장이 여단장 2명과 연대장 3명, 그리고 사단 참모장과 포병연대장 1명을 전격 물갈이하는 일을 저지른 것!

  미 육군 창군 이래 전무후무한 대규모 야전 군 인사가 단행된 셈인데 이는 그나마 전선의 상황에 적응해가던 지휘관들의 전격교체를 통해 복잡하기 그지없던 상황을 더욱 엉망으로 만드는 파국을 초래했다.

 

  이 엉뚱한 결과가 실현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는데 우선 패튼의 전차들이 최일선에서 지휘하던 중 독일군의 기관총과 박격포 사격으로 전사해버린 장교와 부사관들로 인해 우왕좌왕하는 보병부대를 초월해 전진한 것은 그나마 애교로 봐줄만한 부분에 불과했다.

 

  안개가 걷히기가 무섭게 독일 제5군의 맹렬한 포격이 개시되면서 진격은 그대로 정체되어버렸고 시야가 확보된 독일군의 MG 08이 불을 뿜으며 보병들은 엄폐물을 찾아 엎드리기에 바빴다.

  덕분에 아무리 사전에 지도를 충분히 숙지한 보병들조차 점차 자신의 공격방향과 목표를 분간하지 못하는 촌극을 벌였다.


  여기에 전장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포격을 묵묵히 감행한 미군 포병대의 업적( ? )으로 오발사격이 빈번하면서 숱한 사상자까지 발생하는 형국이었다.

  여기에 제35 보병사단을 경악하게 만든 것은 사단이 최우선적으로 점령해야 하는 세피 일대에 구축된 독일 제5군의 기관총 진지가 무려 25개에 달한다는 사실이었다.

 

  전차부대와의 제대로 된 합동작전도 어려운 마당에 보병만으로 이 견고한 방어진지들에 달려드는 것은 문자 그대로 사단을 소멸시키는 결과만 낳을 뿐이었다.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 바로 패튼이 나타났다.

  전선에 모습을 드러내기가 무섭게 그는 우선 사분오열돼 우왕좌왕하는 병사, 지휘관을 잃거나 공포에 사로잡힌 이들을 모조리 긁어모았다.

 

  첫 부상

 

  보병들을 어느 정도 수습하는데 성공한 패튼은 독일군의 대전차호를 극복하지 못한 채 주저하고 있는 2개 전차소대를 발견해 당장 전차병들을 끌어내 우회로를 찾아내도록 지시했다.

  그 때까지 맹렬하게 날아드는 7.92mm×57 탄막에 질려버린 전차병이 엄폐할 것을 권고함에도 불구하고 “웃기지 마! 저 녀석들은 절대 나를 못 맞춰!”라고 반박하는 패튼의 용기( 반은 무모하다고도 볼 수 있는 )가 빛을 발했는지 전차들이 진격을 재개했다.

 

  이후 보병들이 엄폐한 지점으로 돌아온 패튼은 근처에서 주워온 나무 막대기를 지휘봉 삼아 흔들며 “돌격 앞으로!”를 외쳤다.

 

  그야말로 전투지휘의 모범이나 다름없는 이 기백 앞에 병사들이 따라나서며 마침내 전방의 작은 구릉을 돌파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구릉을 넘기가 무섭게 더욱 맹렬해진 MG 08의 탄막을 뚫는 것이 핵심 목표가 되었다.
  7.92mm×57탄이 포복 전진하는 자신의 주변을 빠르게 스쳐가자 패튼은 순간적으로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의 양손은 땀으로 가득찼고 입안은 바짝 말라가기 시작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아마 이 순간 퇴각을 명령하거나 본인부터 이탈하는 것이 상식이겠지만 그는 자신의 조상들이 내려다 보고 있을 것이라는 부담감이 더욱 심한 상태였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보병들을 향해 “이제 돌격을 감행할 것이다. 나와 함께할 지원자 없는가?”를 외쳤지만 자원한 이는 겨우 6명에 불과했다.

 

  이미 사방이 기관총 탄막으로 가득한 마당에 몸을 일으켜 돌격한다는 것은 1904년 뤼순의 보루들을 향해 돌격한 일본 제3군 병사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음에도 패튼은 숨을 고른 후 바로 “나를 따르라!”를 외치며 돌격했고 그 순간 50m 정도 떨어져있던 독일군 진지에서 날아든 탄환이 그의 왼쪽 넓적다리를 관통해 고환 바로 옆을 뚫고 나갔다.

 

  순간적으로 당한 관통상이었고 패튼은 신속하게 근처의 포탄 구덩이로 몸을 피했다.

 

  당번병이 신속히 달려와 붕대를 감아 응급처치를 했지만 순간 반격에 나선 독일 제5군 병사들이 35m 전방까지 접근해 포탄 구덩이에 숨은 미군을 색출하고 있어 그로서는 순식간에 포로가 될 위기에 처할 판이었다.

 

  그 와중에도 패튼은 당번병을 두 차례나 내보내 지나가는 전차에 근처의 독일군 기관총 진지 위치를 알려주기도 했다.

 

  때마침 전차를 후속해온 위생병이 추가적으로 치료를 해줌에 따라 13시 30분경, 들것에 실려 제35 보병사단 야전 사령부로 이동한 패튼은 참모장에게 보고 후 야전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그가 사단 사령부로 이동하던 시각, 마침내 제35 보병사단과 패튼의 전차병들은 세피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그야말로 애를 먹은 끝에 가까스로 핵심목표를 손에 넣었지만 그 대가는 참혹했다.


  공격개시 첫 날에만 독일군의 포격과 고장으로 전차 43대를 손실한 것이 뼈아팠지만 더 심각한 것은 전차병이었다.

 

  여단 예하 2개 전차대대에서 전투를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전차병이 겨우 55명에 불과하고 장교는 절반 이상, 부사관은 무려 25% 이상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한 상황이었다.

  며칠 간의 휴식과 재편성이 이뤄졌지만 여단장의 눈에도 현 상태로는 전투를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해보였다.

 

  패튼의 부상 및 후송으로 전쟁은 사실상 끝났지만 뫼즈-아르곤 전투를 통해 미군과 프랑스군은 무려 192,000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었지만 독일 제5군을 몰아붙이며 승리를 거두었고 26,000여명을 포로로 잡는 개가를 올렸다.

 

  그리고 1918년 11월 11일, 마침내 독일의 패배로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었다.

 

  무료한 일상

 

  전쟁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자 패튼은 졸지에 실업자나 다름없는 입장에 처했다.

 

  10월 초 베아트리스 아이어에게 편지를 보낼 여유가 생겨 “엉덩이 반쪽은 날아갔지만 이거 빼고는 걱정할 것이 없소”라는 농담까지 첨언할 정도로 무료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병실에 부상을 당한 전차부대의 장교 몇 명이 같이 입원해 있어 무용담을 나누며 따분함을 날려버릴 수 있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특히 전차부대 소속임에도 엉망진창이 된 보병들을 수습해 지휘하다 부상까지 당한 입장이라 혹시라도 의회 명예훈장이 수여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부풀어오르기도 한 패튼은 10월 17일, 전시계급인 대령으로 진급하는 영예를 누렸다.

 

  아직 출혈이 멈추지 않은 상태였지만 대령으로 진급한 기쁨이 더욱 앞선 패튼은 10월 말을 기해 전차학교로 복귀했고 우선 엉망이 되어있는 교육생들의 복장과 행동, 군기를 잡기 시작했다.

 

  또한 “독일군과 연합군의 전쟁론”이라는 제목의 논문 집필에도 착수했는데 이 논문에서 그는 연합군과 독일군의 차이점을 주로 다뤘다.

 

  여기에 전차를 주력 병기로 인식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정작 미군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시까지 전차를 보병 지원용으로 투입하고 독일 전차부대는 구축전차로 대응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한편으로 패튼은 오랜 야전생활에 그리워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중위 계급으로 유럽에 온 지 불과 2년이 되지 않아 부상을 당하기는 했어도 대령까지 고속 진급한 패튼은 귀국길에 오르며 퍼싱 장군에게 “보살핌과 헤아림에 감사하고 장군님을 본보기로 삼아 더욱 열심히 군 생활에 정진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1919년 3월 17일, 패튼 대령이 탄 수송선이 마침내 뉴욕에 입항했다.

 

  전차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각 언론사의 기자들에 둘러싸인 패튼 대령은 준비한 대로 기사거리가 될만한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훗날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그러했지만 그의 대( 對 ) 언론대응 방식은 숱한 장성들의 본보기가 되기에 충분할 정도로 능숙했다.

 

  그는 하나의 사실만 딱 부러지게 설명하는 것이 아닌 수많은 언론사들이 각자 독점적으로 기사를 쓸 다양한 소재를 준비해 각기 배분했는데 어지간한 공보장교나 정훈장교도 쉽사리 수행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화려한 신고식을 마친 패튼은 캔자스 주 포트 레븐워스의 지휘참모대학에 진학하고 싶어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무료한 일상을 보내기도 싫어 기갑부대 근무를 희망하기도 했다.

  다행히 메릴랜드 주에 신규 창설된 전차부대로 배치된 패튼 대령은 자신이 전쟁 기간 중 획득한 전투경험을 바탕으로 전차의 중요성을 열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전차 지휘는 경전차인 르노 FT-17에 국한돼 있었고 이 당시 미 육군은 이런 경전차보다는 영국군의 최종 개량형인 마크 Ⅷ 전차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전차를 르노 FT-17과 함께 국내에서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리버티 전차의 탄생이었다.

 

  한창 미군의 전차전력이 성장의 기미를 보이는 시기 패튼은 워싱턴에 파견근무를 나가며 잠시 부대 지휘를 선임장교에게 맡겼는데 바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중령이었다.

 

  1915년 보병 장교로 임관한 이후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 펜실베니아주의 전차병 훈련소에서 근무한 아이젠하워 중령은 패튼처럼 고속승진을 거듭한 경우였다.

 

  이 두 영관장교는 의기투합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1919년 한해 동안 우정을 돈독하게 다져나갔다.
  두 사람이 나눈 우정의 근간은 군인정신으로 아이젠하워는 “우리 두 사람은 최신 군사이론을 연구했고 장래 일어날 전투에서 전차가 큰 역할을 해줄 것이라 확신했으며 이 녀석에게 심취했다”고 회상했다.

 

  그들은 밤을 새워가며 기습과 집중공세를 통해 적을 섬멸하는 전차부대의 눈부신 미래를 토론했다.

 

  대위로의 복귀

 

  1919년 봄, 퍼싱 장군은 가장 유능한 상급 지휘관과 참모들을 선발해 군 편성과 전술을 토의할 미국 원정군 위원회를 신설했다.

 

  이 위원회의 목적은 육군의 무기체계와 각 병과의 운용을 연구해 미래 육군 발전을 건의하는데 있었다.

 

  그 결과 위원회는 총 184쪽에 이르는 보고서를 제출했으나 이 중 전차를 다룬 것은 겨우 2쪽에 불과했다.

 

  위원회는 전차가 보병을 지원하는 병기이며 독립된 작전 수행이 불가능하고 통상 대대나 중대 단위 혹은 상황에 따라 군단이나 사단 직할로 배속돼 운용하는 것이 탁월하다는 어이없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특히 퍼싱이 직접 보고서에 “전차 운용은 점차 증대될 것이지만 결정적인 시기에 집중적으로 투입하는 것이 필요하며 당분간 보병을 근접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첨언하는 바람에 전차의 입지는 그만큼 좁아지고 있었다.

 

  베이커 육군장관과 미치 육군참모총장은 독립된 전차부대를 창설하고 싶어했지만 남북전쟁 이래 최대의 전쟁영웅으로 급부상한 퍼싱의 위세를 당해낼 수가 없었고 종전과 함께 급격히 감소된 예산으로는 새로운 기갑병과를 창설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특히 육군재편성에 관한 공청회에서 미시건 주의 한 의원은 전시에 독립된 기갑부대가 필요하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이미 세분화된 육군에 굳이 새로운 병과를 당장 창설해야 한다는 것은 그리 절박하지 않다는 발언을 함으로써 당시 미국의 분위기를 대변했다.

 

  더욱이 당시 미 육군은 보병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강조했고 당연히 전차를 독립된 병과가 아닌 보병부대의 지원전력으로 흡수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이런 답답한 상황 아래 패튼은 1920년 보병병과의 공식 잡지인 보병 저널( Infantry Journal ) 5월호에 전차부대의 독립 편성 및 독자적인 전술을 개발해야 한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패튼은 “전차가 보병에 흡수되면 전장에서 통제가 되지 않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고 마치 오리의 세 번째 발이 되는 격”이라며 강력하게 역설했고 11월호에는 아이젠하워까지 전차의 독립성과 역할을 강조하는 논문을 발표할 정도였다.

 

  그러자 미 육군 보병감은 즉각 아이젠하워 중령을 출두시켜 논문은 전적으로 잘못되었고 매우 위험하기 그지 없다고 구두경고 조치를 내렸다.

 

  이 때문에 아이젠하워는 몸을 사리게 된 반면 패튼은 8월 15일, 기병대로 전출신청을 하는 등 보병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는 전차부대 근무를 원할 뿐이었고 평시 계급인 대위로 돌아온 상태였지만 진급이 보장된 보병병과로 옮긴들 이미 윗선과 연통을 새롭게 조성하기에는 곤란한 점이 많은 상태였다.

 

  그의 전출신청은 받아들여져 포트 마이어의 제3 기병연대 대대장으로 보직된 패튼 대위는 평상시 장인의 재력으로 다져놓은 인맥들과 만찬을 즐기거나 폴로 게임을 하는 등 평범한 일상을 보냈다.

 

  한편으로 대대의 기강 확립에도 힘써 병영의 막사와 마구간은 언제나 깔끔하게 정돈되었고 워싱턴에서 거행된 분열행진과 의장행사에서는 참관한 시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겨주기까지 했다.

 

  이 시기 패튼은 폭넓은 독서에 취해 밤에는 주로 클라우제비츠와 크세노폰을 비롯 풀러에 이르는 군사이론 서적과 프리드리히 대제, 나폴레옹과 같은 명장들의 저서 및 제1차 세계대전사와 러일전쟁사,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독일 통일전쟁사 등을 탐독했다.

 

  전시에는 날리는 지휘관이었지만 막상 종전 이후 급격하게 감축된 미군에서의 일상은 그리 순탄치는 않았음에도 패튼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계속-

  

2019년 11월25일 01시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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