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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장수왕의 분노, 한성백제 무너지다.

고구려 장수왕의 분노, 한성백제 무너지다.

 

백제 개로왕의 국서  그리고 장수왕 격노하다.

 

서기 472년.  위나라에서 암약하던 고구려의 세작으로부터 긴급한 첩보가 막 고구려 왕궁에 도착하였다. 고구려의 특수조직인  천리인(千里人)이 가지고 온 첩보는 극비중의 극비문건이기 때문에 바로 고구려의 장수왕앞에 보고되었다.  당시 고구려는 중국 위나라를 비롯해서  백제 신라등 주변국에  첩자를 심어놓고 있었고 그들은  중요한 정보는  신속하게 고구려왕궁에 보고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천리인은 장수왕이 직속으로 관리되는 일종의 특수병과이기 때문에  중간단계를 거치지 않고 직접 왕에게 보고할 수 있었다. 장수왕앞에 도착한 천리인은  고구려 무사 특유의 인사법으로 오른쪽 다리를 뒤쪽으로 주욱 빼고 왼쪽무릎은 굽히는 전형적인 무사의 예를 취하면서 보고하였다.

 

"대왕마마. 신(臣) 긴급히 아뢰옵니다. 백제 개로왕이 이번에 북위에 국서를 보냈는데 그 내용을 입수하였사옵니다."

 

"방금 뭐라 하였느냐? 백제 개로왕이 위나라에 국서를 보냈다고?  우리 선대왕이신 광개토호태왕에게 고구려의 신하국이 되겟다고 맹세한 백제가  위나라에 국서를 보내? "

 

장수왕은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고구려는 백제가 중국과 통교하는 바닷길과 육상길 모두를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가 중국 위나라(북위)에 국서를 보냈다는 보고에 더더욱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천리인은 이어서  장수왕에게 긴급정보사항을 조목조목 보고하였다.

"예 그러하옵니다. 백제 개로왕이 위나라에게  우리 고구려를 공격해 달라는 밀서이옵니다. 대국인 북위가  우리 고구려를 공격해주면  백제가 남쪽에서 호응해서  협공하겠다는 것입니다."

 

자리에서 금방이라도 벌떡 일어날 듯한 기세로 장수왕은 재차 다그쳐 물었다.

 

"그 댓가는 무엇으로 한다 하느냐? 위나라가 아무댓가 없이 그냥 움직이지는 않을 것 아니냐"


"백제는 위나라에 조공을 하고 싶어도 승냥이 같은 고구려가 길을 막고 있어서 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만약 위나라가 고구려를 쳐주면  백제의 왕자와 공주를 위나라 왕실에 종으로 바치겟다고까지 하였다고 하나이다."

 

이를 들은 장수왕의 눈에선 핏발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백제 이놈들이 뜨거운 맛을 더 봐야 하겠구나. 그렇다면 위나라는 어떻게 반응을 보이더냐"

 

"위나라는 백제사신에게  당장은 고구려를 칠 명분이 없다고 하면서  앞으로 좀 더 지켜 보자고 한 줄로 아뢰옵나이다. 그리고 백제사신은  서해 앞바다에서 건져올린 말안장을 보여주면서  위나라 사신의 말안장인데 아무리 봐도 고구려가 위나라 사신을 죽인 것 같다고 모략까지 하였나이다."

 

장수왕의 주먹이 불끈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이번엔 고구려의 대대로(고구려의 관등)가 침착하게 되물었다.

 

"현재 위나라의 군사움직임은 어떻더냐?

 

"아직 위나라는 별다른 움직임은 없는듯 하나이다.  그리고 그 말안장에 대해서도 위나라의 것이 아닌 것 같다고 하면서  그저 백제의 뜻은 알았다고만 하면서 아직까지 위나라내에서 군사이동은 없는 것으로 파악했사옵니다"

 

그렇게 간략히 보고하면서  개로왕이 위나라에 보낸 국서의 내용을 적은 문서를 장수왕에게 올렸다. 장수왕은 그 내용을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백제 개로왕이 위나라에 보낸 국서의  내용은 이렇게 시작하였다.

 

『신은 나라가 동쪽 끝에 서 있고 승냥이와 이리[豺狼:고구려]가 길을 막아, 비록 대대로 신령한 교화를 받았으나 번병(蕃屛)의 예를 바칠 수 없었습니다. 멀리 천자의 대궐[雲闕]을 바라보면 달리는 정이 끝이 없습니다.

 

신은 고구려와 더불어 근원이 부여(夫餘)에서 나왔습니다. 선세(先世) 때에는 옛 우의를 두텁게 하였는데 그 할아버지 쇠(釗)[고국원왕]가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가벼이 저버리고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臣)의 국경을 함부로 짓밟았습니다. 저의 할아버지 수(須)[근구수왕]가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잽싸게 공격하니, 화살과 돌(矢石)로 잠시 싸운 끝에 쇠(釗)의 목을 베어 달았습니다. 이로부터 [고구려는] 감히 남쪽을 돌아다보지 못하였습니다.

 

고구려는 결국 우리 백제를 무시하고 침략을 하게 되었습니다. 원한을 맺고 전쟁의 참화가 이어진 지 30여 년이 되었으니 재정은 탕진되고 힘은 고갈되어 나라가 점점 쇠약해졌습니다. 만일  폐하의 인자한 생각이 먼 곳까지 빠짐없이 미친다면 속히 장수를 보내 우리나라를 구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준다면 저의 딸을 보내 후궁을 청소하게 하고, 자식과 아우를 보내 외양간에서 말을 기르게 하겠으며, 한 치의 땅, 한 명의 백성이라도 감히 저의 소유  로 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이어나가는 백제 개로왕의 국서는 장황하게 글이 이어지면서 시종일관   고구려 장수왕의 이름 거련(巨)을 들먹이면서 포악하기 이를데 없기 때문에 징벌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요지였다. 

 

그러나 위나라의 반응은 냉담하기까지 하였다.  당시 중국에서의 강국이었던 위나라조차도  고구려는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위나라는 백제의 고구려에 대한 협공제의를 바로 수락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도리어 한발 빼는 모습이었다.  한편 고구려 장수왕도 위나라와는 공연히 적대적 상황으로 몰고 갈 필요성이 전혀 없을 때였다. 즉, 고구려와 북위는 서로의 존재를 의식한채 군사적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서로 적대적이던 위나라와 고구려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백제로서는 도리어 안절부절 못할 지경이 된것이었다. 왜냐하면 위나라와 고구려가 서로 싸워야  백제로서는 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제 개로왕은  위나라와 고구려를 이간시키기 위한 국서를 보낸 것이었다.

 

 

긴급전령인 천리인의 첩보보고가 끝나자 장수왕은 어금니를 꽉 깨무는 것이 양쪽 볼을 통해서 보일정도로 뭔가 큰 결심을 한 듯 보였다. 그런가 싶더니 장수왕은 용상에서 박차고 일어나면서

 

"여봐라.  내 기필코 백제를 피로서 응징하리라.  선대왕이신 광개토호태왕께선 백제아신왕의 거짓 눈물에  아량을 배풀어 주셔서 오늘날까지 백제를 그 땅에 살도록 해 주었건만  이 백제놈들이 감히 우리 고구려의 아량에 도전하는 형국에 이르렀다.  이것을 보고만 있고 응징하지 못한다면  더 큰 화가 고구려에 미칠것이다. 그래서 고구려의 힘과 광개토호태왕과의 약속을 저버린 백제는 그 댓가를 피로 갚아야 할 것이다. "

 

장수왕의 불같은 엄명은  그 자리에 있었던 여러 대신의 귓속에 날카로운 칼날의 부딪힘과 같은 소리로 파고 들었다. 

 

 

  격동의  시기  4~5세기 

 

4~5세기는 세계사적으로 볼때 동서양을 막론하고 격동의 시작을 알리는 시대였다.  서양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시작되면서  서로마가 붕괴되기 시작했고  중국대륙에선 5호16국시대로 일컬어지는 전쟁의 시기였다. 이런 세계사의 흐름은 동아시아에서도 물결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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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설명 : 5호16국이 화북지역을 차지하면서 동아시아는 그 어느때보다 격동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이때 고구려도 최전성기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서기 400년대인 5세기 초기는  한반도에서도 대전쟁의 물결이 휩쓸고 지나가고 있었다.  광개토대왕의 고구려가 팽창정책을 펴자  여기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나라는 바로 백제와 가야였다.  고구려와 국경선을 맞닿은 백제는 가장 큰 위협을 느끼고 있었고  가야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고구려가 차지함으로써  중국과의 교역이 차단되어 버렸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백제와 가야는 고구려를 공동의 적으로 생각함으로서  "적의 적은 동지다"라는 원리에 따라서 동맹의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한편 백제는  막강한 고구려를 상대하기 위해서 왜열도에서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야마토왜와 우호관계를 맺게 되었다. 모두가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한 백제의 외교정책이었다.

 

반면에 신라는  왜와는 항상 적대적 관계였고 당시 가야와 왜의 협공에 시다리던 신라는 고구려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적의 적은 동지요 적의 동맹은 적이다라는 원리에 따라서 4세기 후반 5세기 초의  동아시아에선  고구려-신라의 동맹라인과  백제-가야-왜로 이어지는 동맹라인으로 질서가 재편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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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이 이끄는 고구려에 혼자힘으로는 당해 낼 수 없었던 백제는 왜의 병력을 이용하기 위해서 아신왕 6년(397년)에  태자  전지(腆支)를 야마토왜에 볼모로 보내면서까지 고구려의 팽창에 맞서는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백제가 왜와 손을 잡았다는 소식은 오히려 광개토대왕의 분노를 사서 고구려는 백제정벌을 감행하였다. 이는 광개토대왕비문에 나와 있는데  백제가 약속을 어기고 왜와 손을 잡았다는 여왜화통(與倭和通)이라는 문구가 바로 그것이다.  광개토대왕비문에 보면  고구려군은 아리수(한강의 옛이름)를 건너서 백제를 공략하니 아신왕은 무릎을 꿇고 항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한바탕 고구려-백제의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한반도 남부에서 또다른 전쟁이 발생했다. 그것은 가야-왜의연합군이 신라를 공격한 전쟁이었다.   가야,백제,왜의 해양동맹과  고구려-신라의 대륙세력이 지금의 경상도지역에서 동아시아의 운명을 결정짓는 전쟁을 치루었다.  광개토대왕비문에도 나오는 이른바  고구려의 신라 구원전쟁이 바로 그것이다.  

 

가야와 왜 연합군이 서기 400년 신라를 공격하자  당시 신라 내물왕은 광개토대왕에게 긴급 구원을 요청하였고,  신라의 요청을 받은 광개토대왕은 보기병 5만을 보내어서  신라땅에 들어온 가야와 왜 연합군을 싹 쓸어 버린 전쟁이었다.  이때 광개토대왕의 고구려군에 심대한 타격을 받은 지금의 부산 김해일대의 가야세력은 그 주력이 지금의 일본열도쪽으로 빠져나갔다.그래서  그 후 가야세력은 점차 쇠잔해져서 결국 신라에 병합되어버린 결과가 되고 현재의 경상도 일대는 신라가 차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가야와 함께 신라를 공격했던 왜(구주지역)도 전쟁에 진 후유증이 없을리 없었고  결국  구주지역의 왜는  야마토(오사카 긴키지역의 왜)에 흡수되어 버린 결과가 되었다. 이것이 5세기 초 동아시아 전쟁의 결과였다.

 

참고로 말한다면  이때 가야와 함께 신라를 공격한 왜는 학자들에 따라서 약간식 다르지만 대체로 키타큐우슈우(北九州)지역의 왜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원래 왜(倭)라는 호칭은 왜인 스스로 부른 것이 아니라  중국인들이 부른말이다. 일본서기에 보면 오늘날 구주지역은 구마소(熊襲)이라 불렀다. 현재의 시점처럼 일본열도를 보듯이 고대(3~4세기)에도 똑같이 봐선 안된다. 우리도 고구려 백제 신라로 나뉘어 있었듯이 우리가 통칭 왜라고 부르던 일본 열도도 여러나라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 장수왕의 평양천도와 한성백제 마지막 임금  개로왕의 등장.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어 장수왕이 등장하면서 고구려정치권력에 일대 폭풍이 불어 닥쳤다. 고구려는 원래 왕권이 강한 나라가 아니라  5부족 연합체성격이 강한 나라로 출발하였다.  그 5부(部)는 소노부(消奴部)·계루부(桂婁部)·절노부(絶奴部)·관노부(灌奴部)·순노부(順奴部)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왕권을 능가하는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슴을 말한다.  결국 이는 왕권과의 충돌을 빚게 되는게 그 절정은 장수왕의 평양천도로 표출되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도의 천도는 정치적으로 가장 큰 갈등을 초래하기 마련이다. 천도는 정치적 기반이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인데  장수왕의 평양천도도  엄청난 정치적 반대에 직면했었다. 그래서 장수왕은  천도에 반대하는 세력을 무력으로 진압하게 되는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숙청을 통해서 약 2000여명을  피를 흘렸다. 그만큼 고구려 내부적으로 일대 혼란을 격고 있었다.   이렇게 기존의 귀족세력과 정치적 갈등을 겪고 있던 장수왕은  내부으 결속을 위해서라도  그 시선을 밖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방책중 하나가 바로 남진정책이었고  그로 인해서 백제는 커다란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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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설명 :  5세기 장수왕때의 국제 정세. 화북지역은 위(북위)나라가 통합하고 하남지역은 송나라가 차지함으로써 중국대륙은 남북조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이때 고구려 장수왕은 국제역학을 잘 이용하는 실리외교를 펼치고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장수왕 시절엔  중국의 화북지역에는 위나라(북위)가 5호16국을 통일하여 강력한 국가로 등장하였다. 그리고 남쪽엔 송나라가 등장함으로써 중국대륙은 남북조시대가 되었다.  이때 국제역학관계는 북위에 이웃나라들은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자연히 송나라와 고구려는 우호적 관계에 놓이기 마련이다. 그러던중 유연이 위나라의 압박에 무너지면서 왕족과 일반백성의 피난행렬이 고구려로 들어왔다. 위나라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이들 피난민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때 북위와 적대적 관계에 있던 남쪽의 송나라가 유연의 왕족을 도우려 오려하자 고구려는 북연의 왕족을 죽여 버렸다. 이는 장수왕이 북위와의 관계를 고려해서 등거리 실리외교를 펼친 결과였다. 물론 이 배경에는 고구려의 군사력이 뒷받침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로서  고구려는 서북쪽 위나라와의 군사적 충돌가능성을 불식 시킬 수 있었다. 그 결과 장수왕은 남진정책에 집중할 수 있는 외교적 기반을 닦은 셈이었다.

 

한편 백제도 격변의 시기를 맞고 있었으니 바로 한성백제의 마지막 임금인 개로왕의 등장이었다.  백제는 아신왕시절에 광개토대왕에 무릎을 꿇은 후 왕권이 약화되어 있었다.  특히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서 왜와 동맹관계를 맺고자 왜에 볼모로 보내어진 전지왕이 왕위에 오르는데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 내용을 삼국사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전지왕 원년(405년)

전지왕(腆支王)<혹은 직지(直支)라고도 하였다.>은 양서(梁書)에는 이름을 영(映)이라고 하였다. 아신(阿莘)의
맏아들이다. 아신이 재위 제3년에 태자로 삼았고, 6년에 왜국에  볼모로 보냈다. 14년에 왕이 죽자 왕의 둘째 동생 훈해(訓解)가  정사를 대리하면서[攝政] 태자의 환국을 기다렸는데, 막내 동생  혈례(蝶禮)가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전지가 왜국에서 부음(訃音)을 듣고 소리내어 울며 귀국하기를 청하니 왜왕이 병사 100명으로써 호위해 보냈다.


전지가 국경에 이르자 한성 사람 해충(解忠)이 와서 고하였다.  “대왕이 죽자 왕의 동생 혈례가 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원컨대 태자는 경솔히 들어가지 마십시오.” 전지는 왜인(倭人)을 머물러 두어 자기를 호위하게 하고, 바다의 섬에 의거하여 기다렸더니, 나라 사람들이 혈례를 죽이고 전지를 맞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왕비는 팔수부인(八須夫人)이니 아들 구이신(久尒辛)을 낳았다.

 

즉, 아신왕이 죽자  왜에 가있던 태자 전지가 백제로 돌아오기까지의 공백기간에 이른바 왕자의 난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 태자 전지를 왕위에 오르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귀족세력이 백제의 8대 귀족세력중 하나인  해(解)씨세력이었다. 이 해씨 세력은 마치 조선시대  안동김씨 세력처럼 위세를 떨치던 백제의 전통귀족세력이었다.  5세기의 백제는  한마디로  해씨 귀족세력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백제 개로왕이 왕위에 오른 시기는 서기 455년이었다. 해씨 귀족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개로왕의 등극또한 순탄치 않았다.  피가 튀는 일대 정변(政變)을 통해 왕권을 강화시켜 나갔던 것이다.  해씨 귀족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관직을 차례차례로  왕족으로 채워 나갔으니 개로왕과 백제 귀족세력간에는 알력이 날로 커지고 있었다. 이러한 국내의 정치적 상황은  고구려 장수왕이나  백제 개로왕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백제 개로왕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하면서 한편으로는 고구려의 압박에 대응하기 위해서 외교적 노력에 경주하였다. 그중 하나가 바로  고구려에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위나라(北魏)를 백제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국서를 보냈던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야마토왜와의 군사적 동맹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 동생 곤지를 왜에 파견한 것이다.  이 곤지의 아들이 바로 공주 무녕왕능으로 유명한 무녕왕이다.  일본서기엔  사마왕으로 기록된 백제왕이다.

 

이런 백제 개로왕의 귀족세력에 대한 정치적 압박으로  일부 백제귀족은 고구려로 망명하였는데 그중엔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이들은 나중에 장수왕의 백제공략에 선봉장이 되었다.

 

 백제와 야마토(大和)왜(倭)의 관계

 

백제와 야마토왜의 일종의 국교성립은  여러문헌을 종합해 볼때  백제 최전성기인 근초고왕때로 추정하고 있다. 오늘날 경상남도 창원지방에 있던 탁순국이 왜와 백제의 중간다리 역할을 한 기록이 있다.  탁순국은 가야의 소국으로서 그만큼 해상지리에 밝았다고 볼 수 있다.  이때  백제에 온 왜국 사신에게  백제 근초고왕은  창고를 보여주면서 백제의 국력을 과시하고  왜의 사신은 무척놀랐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전해지고 있다.  또한 이 당시 유물로 추정하는 것이 바로 유명한 칠지도(七枝刀)이다.  백제의 야마토왜에 대한 하사품이다.  이 칠지도를 두고 일본에선 백제가 왜에 헌상한 것이라고 주장하여서 논란을 빚기도 하나  원래 칼이라는 것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사하는 것이다. 특히 고대엔 중앙권력자가 지방권력자에게 권한을 준다는 의미에서 내려주는 것이 바로 칼이고 삼국시대엔 대표적인 것이 환두대도이다.  오늘날에도 보면  장군을 임명할때  대통령이 하사하는 것이 바로 칼인 것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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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 있는 백제초기(4~5세기) 계단식 적석총으로서 이중 3호분은 그 규모가 가장 크고 그 양식도 고구려의 장군총과 동일하다.  학자들은 석촌동 3호분을 백제 최전성기를 만든 근초고왕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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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장군총을 그래픽으로 복원한 것이다. 동양의 피라미드라고 불리고 있는데 무덤은 중간층에 석실을 만들어서 안치한다. 그리고 최고상층부엔 사당을 짓는 형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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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국 길림성 집항현, 옛 고구려 수도에 있는 장군총이다.

 

 

 

이렇게 관계를 맺은 백제와  야마토왜는 왕실간에 혈연관계, 즉 결혼관계로 발전하였을 것으로 학계에선 추정하고 있다.  즉 왕실간 혈연관계를 맺으면 그 관계는 더더욱 밀접하게 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흔히 백제가 선진기술을 왜에 전달해 주어서 야마토왜가 발전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좀 다른 각도에서 재조명 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백제가 자선사업가도 아니고 그냥 선진기술을 타국인 왜에 전달해 준다는 것은 이치상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선진기술의 전술이라는 것도 그 기본바탕은 사람에 의해서 전달되는 것이다. 즉, 백제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 당시 왜로 건너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미국과 유럽의 관계를 보면 고대 일본열도와 한반도와의 관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있기까지의 관계를 보면 처음엔 유럽에서 신대륙을 찾아 이민을 가고 그리고 식민지를 개척하고 그 다음엔 미국이라는 새로운 나라가 생겼다.  그 후 19세기와 20세기를 걸쳐서 구대륙인 유럽에서 전쟁이나 정변이 있을때마다 수많은 유럽인들이 신대륙인 미국으로 건너가서 정착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적으로  유럽의 문물이나 기술이 미국에 이식되었다. 그 후 역사는 독자들도 잘 알다시피 2차대전때에는  영국이 도리어 미국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았던 것이 20세기의 역사였다.

 

이것과 똑같은 역사과정이  고대 백제와 왜의 관계에서도 벌어졌던 것이다.  국력의 팽창은 첫번째 인구의 팽창에 기반하는데  고대 일본열도에서도 19~20세기 미국에서 있었던 것과 똑같이  한반도의 가야지역과 백제지역에서 많은 이민이 있었던 것이다.  특히 백제의 경우  백제내부에서 정변이 났을때 그 정변에서 패한자들이 정치적 망명지로 택한 곳은 응당 인근국가였는데 여기엔 왜도 포함되어 있었다. 앞서 언급한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의 경우 고구려로 망명한 백제귀족이었다.  이런 정변보다 더 많은 이주민이 생기는 때는 바로 전쟁때인데  특히  광개토대왕의 백제정벌때 많은 백제인들이 왜로 이주했을 것으로 짐작 할 수 있다.

 

실제로 광개토대왕이 신라를 구원한 전쟁에서 패한 가야인이 집단적으로 왜열도에 이주한 것은 유물로도 증명되고 있다.   이렇게 광개토대왕의 남정은 백제에겐 치명타를 주었지만  반대로 야마토왜의 입장에서 볼때는  선진기술을 가진 백제인의 유입과  인구증가라는 이중의 효과를 얻게 해 주었다.

 

이런 과정속에서  고구려의 팽창에 대항해야 했던 백제는 군사적 도움을 얻기 위해서 개로왕의 선대왕인 비유왕때는 신라와 군사동맹을 맺게되었다. 그것이 이른바 나제동맹이다.  또한 바다건너에서 야마토왜에게서도 군사력을 지원받게 되는데  그 반대급부로 백제는 고위관료(왕자, 박사)나 기술자를 왜로 보내었던 것이다.  고구려 장수왕과 대치하던 백제 개로왕은 자신의 동생 곤지를 왜에 보내었다.

 

 

 장수왕 백제왕실에 치명적 첩자를 심다.

 

천리인의 보고를 받은 장수왕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키면서 실질적인 백제공략 구상에 들어갔다.  장수왕의 머리속은 온갖 상념이 지나쳐 갔다.  밤 늦도록 잠을 못이루는 장수왕은 심복 최측근들을 자신의 처소로 불렀다. 그 심복부하가운데는  광개토대왕이 평양에  세운 9개의 절가운데  한곳의 주지승인 승려 도림도 있었다.  도림은 장수왕이 마음이 울적해질때면 늘 찾아가는 사찰의 주지승이자  마음의 친구이기도 한 인물이었다.

 

최측근들을 모아 놓고 장수왕은  백제동향을 알려주었다.

 

"아무리 봐도  이번에 백제를 요절내지 않으면 두고두고 화근이 될 것 같소이다. 광개토대왕이 백제 아신왕의 목을 베지 않고 용서해 준 것이 원망스럽소. 게다가  백제놈들이 이제는 신라와도 손을 잡고 바다건너 왜에도 고위관리들을 보내서 모종의 계략까지 꾸민다고 하고 있구려."

 

한 측근이 장수왕에게 근심어린 얼굴로 아뢰었다.

 

"대왕마마. 상심이 너무 크신듯 하옵니다. 그래도 지깟 백제가 감히 우리 고구려에 대항할 수 있겠나이까?  이참에 그냥 백제를 쓸어버려도 될 일 아니옵니까?"

 

그러자 또 다른 측근이 말을 가로 막았다.

" 그렇게 쉽게 볼일이 아니옳습니다. 아직 평양으로 천도한지 얼마되지 않은터라  불만세력이 그 틈을 노릴 수도 있습니다. 만약 지금 백제를 치기위해서 출병한다면  그틈을 노리고 자칫하면 모반이 일어날 빌미를 줄 수 있습니다"

 

다른 측근이 거들었다.

"맞습니다. 지금 당장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백제를 칠때  위나라가 배후에서 우리 고구려를 공격하면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습니다.   또 신라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옛날 신라가 아닙니다. 얼마전엔 실직주(오늘의 삼척)에서 우리 고구려 장수를 살해하지 않았습니까?  비록 신라왕이 사죄사를 보냈지만 그것이 어디 옛날같으면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실제로 서기 450년 신라 눌지왕(34년)때   실직(悉直)에서 사냥하는 고구려 장수를 죽이면서 고구려와 신라는 긴장관계로 바뀌게 되었다. 원래 신라는 광개토대왕때부터 고구려 군사가 신라에 주둔하였는데 벌써 60년이상 흘러가면서 신라내에서 서서히 반고구려정서가 싹트고 있었다.

 

"대왕마마. 신(臣) 도림이 감히 아뢰도 되겠나이까?"

 

순간 장수왕을 비롯한 모두의 이목이 승려 도림의 얼굴로 모아졌다.

 

"오호.  내가 직접 찿아가서 불공을 드리면서 뵈었어야 하는데  이렇게 불쑥 오시게 해서 미안하오이다. 어서 말씀해 보시구려"

 

"아아. 별말씀을 다하시옵니다. 대왕마마.  나랏일에 응당 이 중놈도 몸을 바쳐야지요. 여러 대신들 말씀들 듣고서 감히 한말씀 여쭙는다면 저의 생각은 이러하옵니다.  무릇 나라는 내부의 적으로 먼저 망한다고 하였사옵니다. 아무리 작은나라라도  왕과 신하간에 내부결속이 다져 있으면 그 어떤 공격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사옵니다. 반면에 아무리 큰 나라라도 내부의 적으로 분열하면 저절로 망하는 이치이옵니다"

 

장수왕은 자신과 같은 생각이라고 느꼇던지 크게 호응하였다.

"맞소이다. 내가 지금 바라는 바도 바로 그것이오. 손자병법에도 무릇 이겨놓고 싸운다는 말이 있지 않소이까? 내 생각도 먼저 백제를 내부적으로 흔들어 놓고 그 다음에 전광석화처럼 밀어부칠 생각이오이다. 그런데 그 일을 할 적임자가 없어서 고심하고 있던 것이오이다."

 

듣고 있던 대신이 놀란 말투로 끼어들었다.

 

"대왕마마, 그렇다면  백제왕실에  첩자를 심어야 한다는 말씀이옵나이까?

장수왕은  아무 말 없이 고민에 잠겨있었다.

 

그 순간 도림이 다시 말을 꺼내었다.

 

"대왕마마, 소승이 전부터 도(道)는 잘 알지 못하옵나이다. 그러나  소승 또한 고구려의 백성으로 나라에 은혜를 갚는 것은 백성의 도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사옵니다. 원컨대 대왕마마께서 신을 불초하게 여기지 마시고  소승에게 나라를 위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지시하여 주시오서서.  무슨 일이든 시키신다면 기필코 대왕마마의 명령을 욕되지 않게 하겠나이다. "

 

장수왕은 밝은 얼굴로 도림을 보면서 답했다.

" 허허허허, 그대 도림이 첩자로 나서겠다 하니 반가운 소리요. 진정으로 소임을 맡을 수 있겠소이까?"

 

"대왕마마. 소승 비록 부처님에게 불공을 드리는 입장이오나  소승을 찾아오는 많은 신도들을 통해서 백제의 실상을 잘 알고 있나이다. 특히  백제에서 우리 고구려로 넘어온  고이만년과  재증걸루 또한 소승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있어서  백제와 연결이 가능하나이다"

 

이렇게 해서  고구려 장수왕은  승려첩자 도림을  백제왕실에 잠입시키게 된다.  도림이 백제 개로왕에게 접근하는 과정을 삼국사기엔 이렇게 적고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25권 개로왕21년의 기록이다.

 

 고구려 장수왕이 몰래 백제를 도모하려 하여 백제에서  간첩(間諜)할 만한 자를 구하였다. 이 때에 승려 도림(道琳)이  모집에 응하여 말하였다.

“어리석은 이 승려가 아직 도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생각합니다. 원컨대 대왕은  신(臣)을 어리석다 하지 마시고 지시하여 시키신다면 기약코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왕이 기뻐하여 비밀리에 백제를  속이게 하였다.    이에 도림은 거짓으로 죄를 짓고 도망하여 온 것 같이 하여 백제로   들어왔다. 이 때에 백제 왕 근개루(近蓋婁)가 바둑과 장기[博弈]를 좋아하였다. 도림이 대궐 문에 나아가 고하였다. “신은 어려서
바둑을 배워 자못 신묘한 경지에 들었습니다. 원컨대 곁[左右]에서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왕이 불러들여 바둑을 두어 보니 과연  국수(國手)였다. 드디어 그를 높여 상객(上客)으로 삼고 매우  친근히 지내면서 서로 만나기가 늦은 것을 한탄하였다.

 

승려첩자  도림의 활약

 

삼국시대에 불교는 왕실과 밀접하여 승려는 그 행동범위가 일반인보다 자유로웠다. 그래서 그 시대엔 승려가 첩자로 많이 활약을 하였다.  신라의 거칠부가 고구려에서 정보를 빼올때도 승려로 위장하였고 또한 나당전쟁때 당나라에 가있던 많은 유학생과 승려는 신라의 정보원 역할도 겸하였었다.

 

고구려의 첩자 승려 도림이 백제 왕실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반대로 백제 또한 고구려에 대한 정보를 얻기에 노력하고 있었다는 또다른 반증이다.  오늘날 우리도 북한에서 귀순해온 고위관리들은 특별예우를 해주고 있는데 그 이치와 같다고 보면 된다.   특히 장수왕의 평양천도로 인해서 고구려내부에 갈등이 있음을 알고 있던 백제개로왕에게  그것을 핑계로 백제로 망명해온  고구려승려 도림은 아주쉽게 백제조정에 접근할 수 있었다.

 

더우기  바둑을 좋아하던 개로왕의 취미를  도림은  고구려로 망명해온 백제인에게서 이미 알고 있었던 터였다. 그래서 바둑을 매개로 해서 개로왕의 환심을 얻을 수 있었다.  마치 오늘 골프를 잘치면 쉽게 상대방의 환심을 살 수 있는 그런 이치다. 그렇게 해서 백제 개로왕에게 접근에 성공한 도림은 본격적으로 백제내부 분열공작에 착수하였다.

 

 백제왕실에서 개로왕과 바둑을 두고 있던 도림이 슬쩍 실수로 패착을 두었다.

"어이쿠. 대왕마마.  한수만 물려주시면 안되겠습니까?

"허허 한수를 물리다니요.  바둑도 엄연히 승부의 세계아니오.  물리다니요. 그대는 언제 나한테 물려주었소이까? 허허허"

골똘히 생각하던 도림은 결국  바둑돌을 던지고 만다.

"대왕마마. 제가 졌습니다.  이제 대왕마마 바둑실력이 소승을 훌쩍 능가해버렸습니다"

"허허허. 그렇소이까?  혹시 일부러 져준건 아니구요?"

도림은 손사래를 치면서

"대왕마마 무슨 말씀을. 져도 지고는 못사는 사람이옵니다. 일부러 져주다니요.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그럼  어디 다시 한판 더 둘까요?"
"소승이야 남는 것이 시간이온데  대왕마마께옵서 소승과 이렇게 시간을 나누어도 괜찮겠사옵니까?"
"내가 바둑을 두는데  누가 뭐라 한단 말이오?  난 백제왕이란 말이오. 허허허"

"그래도 여러 대신의 이목이 있지 않사옵니까?"

 

그렇게 해서 고구려의 첩자 승려 도림과 백제 개로왕과는 바둑두는 횟수가 늘어만 갔다. 이에 백제대신들은 불만이 쌓여가고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도림의 계책이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바둑을 두던 도림은 슬쩍 개로왕에게 말을 건냈다.

 

"대왕마마.  한말씀 여쭈어도 괜찮겠사옵니까?"
"허허 어제오늘도 아니고  그대가 짐에게 못할 말이 무엇이겠소. 어여 말씀해 보시오"

도림은 머뭇머뭇하면서 어렵게 입을 때는 척한다.

 

"제가 볼때는   고구려에 비해서 대왕마마의 백제는 전혀 쳐질 것이 없사옵니다.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과 언덕과 강과 바다입니다.  이는 하늘이 베푼 험한 요새요 사람의 힘으로 된  형국(形局)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방의 이웃 나라들이 감히 엿볼 마음을 먹지 못하고 다만 받들어 섬기고자 하는데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즉 왕께서는 마땅히 존귀하고 고상한  위세와 부강[富有]한 업적으로써 남의 이목을 두렵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곽은 수선(修繕)되지 않았고  궁실도 수리되지 않았으며, 선왕의 해골은 맨 땅에 임시로 매장되어 있고, 백성의 집은 자주 강물에 허물어지고 있으니  신은 대왕을 위해 찬성할 수 없습니다.”

이런 도림의 말을 들은  개로왕은  그후 대규모 궁궐증축 작업을 벌였다. 그리고 백제 도성인 위례성을 더욱 크게 만들었고 그것을 위해서  많은 백성이 동원되어야 했다.  이를 삼국사기엔 이렇게 적고 있다.

 

이에 나라  사람들을 모두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 안에는 궁실과 누각(樓閣)과 대사(臺榭) 등을 지었는데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음이 없었다. 또 욱리하(郁里河)에서 큰 돌을 가져다가 곽(槨)을  만들어 부왕의 뼈를 장사하고, 강을 따라 둑을 쌓았는 데 사성(蛇城) 동쪽에서 숭산(崇山) 북쪽에까지 이르렀다. 이로 말미암아 창고가 텅비고 백성들이 곤궁해져서 나라의 위태로움은 알을 쌓아 놓은 것보다 심하였다.

 

이렇게 되니  개로왕의 백제왕실과  신하와 백성간에는 그 사이가 더더욱 벌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것이 바로 내부에서 저절로 무너지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그리고 계획이 어느정도 성공하자 도림은 백제궁을 빠져나와서  고구려로 다시 돌아가서 그동안 있었던 일을 장수왕에게 낯낯이 보고하였으니  장수왕의 백제공략의 사전작업은 승려첩자 도림으로 성공적으로 마쳤다.

 

 

 백제 수도 위례성 고구려군에 함락되다.

 

서기 475년 가을  드디어 장수왕은 백제공략을 개시하였다. 고구려 3만대군의 길 안내를 맡은 장수는 다름아닌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尒萬年)이다. 이들은 고구려로 망명했던 백제의 장수였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 백제 개로왕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있었다.  

 재증과  걸루가 이끄는 고구려의 3만 대군은 순식간에 아리수(한강)을 건너서 백제의 위례성의   북성(풍납토성)과 남성(몽촌토성)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그러자 백제개로왕은 성문을 굳게 닫고 싸울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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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설명 : 아차산성의 고구려 보루성 복원 투시도

 

 고구려군은 4방면으로 군사를 나누어 백제 위례성을  협공하였다. 동서남북의 성문 모두를 고구려군은 집중 공략하였지만 깊은 해자와 높은 성벽으로 둘러쳐진 위례성(풍납토성)을 공략하기는 쉽지 않았다. 

 

 일본서기엔 이때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백제 위례성을 포위한 고구려군은 7일 밤낯으로 공격하였다. 바람이 성안쪽으로 불자  불화살을 쏘고 성문에 불을 놓았다. 결국 백제위례를 잃었다.

 

고구려

그림설명 : 경기도 일대의  고구려 군사유적지이다. 주로 성곽과 보루유적인데  광개토대왕부터 장수왕시기에 집중적으로 고구려가 관리하던 유적이다.  특히 양주분지 일대의 주변산은 대부분 고구려의 보루로서 고구려가 이지역을 특히 집중 관리했었슴을 알수 있다.   그리고 임진강 일대지역은  삼국시대나 지금이나 군사적 요충지로서 주요 군사기지가 임진강을 따라서 분포하고 있다.  이 지역은 후에 나당전쟁때는 신라군의 주요 군사기지역할을 하였다.

 

 

 

고구려의

그림설명 :  고구려군의  수로이용을 보여주는 그림이다.고구려군은  광개토대왕비문에도 나와있듯이

기마병력외에도 수군을 적절히 이용함으로써  하천을 군사이동로로 이용하였다.  이렇게 수로를 이용함으로써 백제의 위례성을 기습공략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

그림설명 : 고구려군의 백제 한성 공략때의 고구려군 진격로를 추정한 그림이다. 기본적으로 오늘날도 서울까지 올 수 있는 길은 그림에서 보이는 기동로와 동일하다.  특히 고구려가 백제 한성을 기습포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경기북부지역 일대를 장악한 상태에서 보급에 대한 걱정없이 이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고구려군은 7일간의 공격으로 위례성을 함락시킨 것이다. 고구려군의  화공(火攻)으로 백제 위례성안의 초가집등 목조건물은 불에 타고 한마디로 아비규환이었다.  결국 민심도 항복으로 기울고 군사는 더이상 싸울 기력이 없어져 버렸다. 

 

이 상황에서 개로왕의 탄식소리를  삼국사기는 생생히 전하고 있다.

 

개로왕은 아들 문주(文周)를 불러서  말하였다.
“내가 어리석고 밝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고  썼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백성은 쇠잔하고 군사는 약하니 비록 위태로운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겠는가? 나는 마땅히 사직(社稷)을 위하여  죽겠지만 네가 이곳에서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함이 없다. 어찌 난을 피하여 나라의 계통[國系]을 잇지 않겠는가?”

 

간사한 사람의 말이란 바로 고구려의 첩자 도림의 말을 말한다.  그러나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에 문주는 백제의 장수 목협만치와 조미걸취를 데리고 신라에 원병을 청하러 갔다.

 

이렇게 7일만에 백제의 도성인 북성(위례성:풍납토성)이 고구려군에 함락되자  남성(몽촌토성)에 있던 개로왕은 남성의 서문(西門)을 빠져나와 탈출을 감행하였다. 원래 남성(몽촌토성)은 산성(山城)으로서 군사적 방어진지 성격의 성이었다. 마치  北城(풍납토성)이 조선시대 한양도성이라면 남성(몽촌토성)은 남한산성과 같은 역할이었다.

 

 

 

 

 

수십기의 호위병력과 함께 남성의 서문을 빠져나갔지만 이내 고구려군의 추격에 따라잡히고 급기야 생포되었다.  그러나 누구도 백제 개로왕을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그런데 고구려장수중 한명이 말에서 내려 개로왕 앞으로 나와서 절을 하였다. 그는 바로  옛 백제의 장수 재증걸루였다.

 

재증걸루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개로왕앞에 다가서서 투구를 벗으며 거만한 말투로 말했다.

 "대왕마마.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재가 누군지 알아보시겠습니까? 하하하"

개로왕은 고개를 들어 고구려 장수를 쳐다 보면서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말을 더듬었다.

"아니. 너 너너  너는.  "

"알아 보시는군요.  바로 당신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던 재증걸루이옵니다. 이 한몸 겨우 고구려로 도망쳐서 오늘이 오기를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지 당신은 모를겁니다.  "

그러면서 재증걸루는 개로왕의 얼굴에 침을 세번 뱉고  말을 이어 나갔다.

"내 처자식은  당신의 손에 모두 죽었소이다.  그때 겨우 이 한몸 빠져나가면서 얼마나 피눈물을 흘렸는지 알기나 아는거요?  당신이 호의호식할때 난 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견디며 이날을 기다렸소이다."

개로왕은 그저 벌벌떨며 재증걸루의 호통을 듣기만 할 뿐이었다.

 

아차산성

 

구글지도  : 아차산성과 풍납토성 그리고 몽촌토성

 

"여봐라.  백제 개로왕을   대왕마마가 진을 치고 계시는 아차산성으로 끌고 가도록 하라"

백제 개로왕이 사로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백제군은 모두 전의를 상실하고 속속 고구려군에 항복하엿다. 백제왕실과 귀족 모두가 고구려군에 사로잡혔다. 

 

이 상황을 삼국사기는 그대로 적고 있다.

고구려의 장수 걸루(桀婁) 등은 왕을 보고는 말에서 내려 절한  다음에 왕의 얼굴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는 그 죄를 꾸짖었다.  [그리고는] 왕을 포박하여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걸루와 만년(萬年)은 백제 사람[本國人]이었는 데 죄를 짓고는  고구려로 도망하였었다.)

 

 

 개로왕의 굴욕

 

개로왕을 비롯한 백제의 왕족은 모두 고구려군에 사로잡혀서 아차산성에 끌여갔다. 그곳엔 고구려 장수왕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다음의 상황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조선시대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나라태종앞에 무릎꿇고 항복의 예를 올리던 것보다 더한 굴욕적인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드라마화 해 보자.

 

고구려를 뜻하는 깃발이 죽 꼽혀있는 진지 중앙에  장수왕이 단상에 앉아 있고  그 주위엔 고구려 무장이 도열하여 서있었다. 그 중엔 개로왕이 즉위하면서 반대파에 있다가 집안이 몰살당한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이 개로왕을 노려보면서 서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 앞에 패주로서 포박당하여 있는 개로왕을 보면서 지난 세월을 되세겨 보았다. 새로왕 일파에 죽임을 당하는 처자식을 뒤로하고 백제도성을 빠져나와서 고구려로 망명할 수 밖에 없었던 자신들을 말이다.  그야말로 그들은 와신상담의 수십년을 지내왔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복수의 순간이 지금 그들 재증걸루와 고이만년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DSC_0065.JPG

 그림설명 : 한성백제의 군사방어시설인  몽촌토성의 목책 

 

장수왕 : 높은 단상에서 내려다 보면서  무릎꿇은 개로왕을 엄한 말투로 꾸짖는다.

 

 그대는 광개토대왕시절 우리 고구려에 복속된 나라의 우두머리로서 고구려에 조공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아느냐 모 르느냐. 그런데 네놈은  틈만 나면 군사를 몰고 우리 대고구려에 대항한 죄 죽어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감히 위나라에  몰래 사신을 보내서  고구려를 쳐달라고 부탁을 해? 네 입으로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에서 나온 형제국이라고 하면서 우리 고구려를 승냥이나  이리 혹은 사악한 뱀이라고 비방했을 뿐만 아니라, 짐을 일컬어  ‘조그만 더벅머리 아이’라고 욕보인 죄를 무엇에 비할 것인가!

 

장수왕의 호된 질책에  패자로서 개로왕은 그저 묵묵부답이었을 것이다.

 

장수왕 :  여봐라.  저 무례한 백제의 개로를  참하라.  뿐만아니라 그 식솔 모두 참하라.

 

재증걸루 : 대왕마마.  청이 하나 있사옵나이다.

 

장수왕 : 뭔지 말해보아라.

 

재증걸루 : 오늘이 오기까지 저는 뼈에 사무치도록 기다려 왔습니다. 저의 처자식과 부모 모두 저 개로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대왕마마. 저 개로를 참하는데  제가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옵서서.

 

장수왕 : 오늘의 전공의 제1등 공신은 바로 재증걸루 너인데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라.

 

일본서기엔  이때 백제의 개로왕의  직계 왕족 모두가 참수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신라에  원병을 청하러 갔던  문주와  왜에 건너가 있던 곤지를 제외하고 한성백제의 왕족은 모두 죽임을 당한 것이다.  결국 이 전란후  백제는  문주가 왕위에 오르고 그해 10월 공주로 천도하였다.

 

그런데  백제왕실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개로왕의 손자인  백제성왕은 관산성전투에서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서 참수를 당했으니 역사의 잔인한 운명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박스기사

  ---  개로왕과 곤지 그리고 무녕왕 --

해방후 고고학계에서 최고의 발굴은 바로 공주 무녕왕능 발굴이다.  백제 고분은 대부분 일제시대 도굴되어서 그 유물이 거의 남아있지 않고 있다. 그런데 하늘이 도왔던지 무녕왕능만큼은 전혀 도굴되지 않은 처녀분으로 우리에게 얼굴을 내민것이 1971년 7월 그야말로 우연히였다. 특히 무녕왕능이 그 어떤 고분보다 뜻깊은 것은 무덤의 주인과 무덤을 만든 날짜까지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유일한 고분이기 때문이다. 그 무덤안에서 나온 묘지석에 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寧東大將軍百濟斯 麻王)이라는 명문이 뚜렷하게 나왔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무녕왕에 보면 정확하게 이름이 "사마"라고 기록되어 있고 묘지석에 나오는 무녕왕의 사망일자와 삼국사기 내용이 정확히 일치했다. 이로서 일본학자들조차 우리 삼국사기를 업신여겨 보다가 그 정확함에 놀랐던 일화가 있다.

 

그런데  이 무녕왕은  고대 한일간의 매우 중요한 매개체 역할을 하였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일본서기에도 개로왕의 아우 곤지에 대해서 기록이 남아 있다.(일본서기 편찬자중 상당수는 백제에서 망명해간 학자들로 추정)  백제 개로왕은 고구려 장수왕과의 관계가 급박해지자  동생 곤지를 왜에 파견하였다. 이때 개로왕은 임신한 자신의 아내를 같이 딸려 보내면서 만약 산기(産氣)가 있으면 다시 돌려보내라고 일렀다. 출산이 임박한 부인을 배에 태워 보낸다는 것이 선뜻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전쟁의 기운을 피해서 피신시키는 것으로 보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렇게 해서 왜로 건너가던 도중  진통을 느껴서  카카라시마(各羅島)에서 낳은 이가 바로 훗날 무녕왕이 된다. 이렇게 왜로 건너간 곤지와 무녕왕은  백제와 왜를 연결하는 중요한 일을 하였다. 일본엔 아직도 곤지의 사당이 있다.  

 

 

 한국의 트로이유적 백제 위례성 발굴.

 

 

전설로만 전해오던 트로이전쟁의  독일의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이 1870년부터  발굴해서 트로이 전쟁은 신화에서 역사가 되었다. 그와 똑같은 곳이 바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다.  백제는 크게 한성백제와 웅진백제 그리고 사비백제시기로 나누는데  가장 긴 세월 백제의 역사를 간직한  한성백제의 위례성터를 우리는 1980년대까지도 알지를 못했다.

 

 

  

2013년 06월28일 01시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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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사진] 해군, 제주안보견학 잠수함 ..
육군학생군사학교, 중앙정부기관 최초로 ..

 


월간 디펜스 타임즈 9월호


 1  해군 3함대, 남방해역 사수를 위한 해상..
 2  [포토]"김용우 육군참모총장 7일 오후, ..
 3  미래 꿈나무들을 위한 공군 항공우주과학..
 4  “적(敵)이 도발하면 강력히 응징한다”..
 5  서북도서방위사령부, 적 기습도발 대비 ..
 6  해군 1함대 3특전대대, 적 특수전부대..
 7  2017 해군 순항훈련전단 출항 환송식
 8  「2017PACC&PAMS」개최 예고
 9  214급 잠수함(KSS-Ⅱ) 9번함 ‘신..
 10  무기체계 신뢰성 향상을 위해 산업부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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