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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서울올림픽과 한성백제의 수도 하남 위례성

표지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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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풍납토성의 남쪽 성벽. 무려 2,000여년의 기간을 견더온 한성백제 위례성벽이다. 오늘날은  풍납동 주민의 산책로이지만 서기 475년엔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성백제인은 패망의 고통을 겪어야 했던 곳이다.

 

 

판축토성

 

판축기법으로 흙을 다져서 밑변너비 40m 높이 15m의 거대한 토성의 축성 모습 일러스트레이트

 

 

본문

 

 

88서울올림픽과 한성백제의 수도 하남 위례성

 

 

1981년 9월 30일 전국민의 눈과 귀는 TV방송에 몰려 있었다. 다름아닌 당시 IOC위원장인 사마란치가  중대한 발표를 하기 위해서 단상의 마이크 앞에 있었고 방송은 그것을 생중계중이었다.

 

 

"전국에 계신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 바덴바덴에선 88올림픽 개최지가 대한민국 서울이냐 아니면 일본의 나고야냐가 결정되는 중요한 순간입니다."

드디어 생중계가 시작됐다. 사마란치가 단상에 올라 마이크를 바로 잡더니 입을 열었다.

 

"세울 피프티 투 , 나고야 트웬티 세븐 . 세울!"

 

"우와. 고국에 계신 시청자 여러분 방금 서울올림픽 유치가 확정되었습니다"

 

당시 KBS 파리 특파원이었던 박성범(전 국회의원)씨가 회의장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해줬다.

 

 

순간 장내에 있던 현대 정주영회장을 비롯한 서울 올림픽 유치단은 자리에서 박차고 있어나면서 만세를 부르면서 서로 부둥켜 안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그와 동시에 TV를 지켜보고 있던 전국민도 환호성을 울렸다. 당시 중학교 3학년이던 필자도 TV를 통해 보던 그 장면은 20년이 훌쩍 넘었지만 뇌리에 분명하게 박혀있다. 솔직히 말해서 이것이 진짠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올림픽은 선진국만 하는 것인데 당시 국민소득 1000달라를 겨우 넘긴 한국이 올림픽을 연다니 믿기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 순간의 충격은 2002년 월드컵 4강진출보다 몇갑절 더 컸었다.

 

그후 서울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88서울올림픽 특수로 인해서 경제는 단군이래 최대호황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 그 변화의 속도는 오늘날 중국의 변화속도보다 훨씬 빨랐다. 필자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지금의 코엑스일대를 보면 벌판이었다. 바로 보이는 봉은사와 그 위쪽이 경기고등학교만 보일 뿐이었다. 고층빌딩이 즐비한 지금의 강남도 81년 당시엔 그랬다.

 

그 후 하루가 다르게 잠실일대는 변모해 갔다. 잠실 주경기장이 들어섰고 방이동과 풍납동, 그리고 등촌동 일대도 경기장과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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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80년대 초  잠실일대 모습. 송파구 일대가  한성백제의 위례성터일지는 당시만 해도 전혀 몰랐다.

 

 

몽촌토성과 백제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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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설명 : 몽촌토성과 올림픽경기장이 어울어진 올림픽 공원모습. 몽촌토성은 정확하게는 산성이다.

주위엔 풍납토성과 마찬가지로 해자를 둘러쳐서 방어기능을 극대화한 군사목적의 한성백제의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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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그림 1970년대 당시의 몽촌토성모습이다. 토성 안팍으로 밭이 즐비하다.

 

  

우연하게도 88서울올림픽이 가져다 준 또 하나의 선물이 몽촌토성이었다. 올림픽 평화의 문과 각종 실내경기장과 올림픽공원이 들어설 지역에서 초기 백제의 유물이 나온 것이다. 그래서 정부는 1982년 7월 22일 사적 제297호로 지정하였다. 둘레 약 2.7KM, 높이 6~7m 규모로서 3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고고학자의 건의가 받아들여져서 방이동 일대 올림픽 경기장은 오늘날 모습처럼 백제초기의 토성(원래는 산성임)인 몽촌토성과 어우러진 모습을 하게 되었다. 그 후 1984·1985년의 2차례 발굴조사 결과, 목책(木柵)구조와 토성방비용 해자(垓子)로 되어 있는, 지금까지 확인된 바 없는 특수한 산성구조임이 밝혀졌다. 기록에만 있고 실체는 없었던 한성백제의 얼굴이 아주 조금 살짝 얼굴을 내민 것이었다.

 

이때만 해도 학자들은 반신반의 했다. 과연 몽촌토성이 한성백제 400년의 도읍인 하남위례성일까하는 의문이었다. 왕성이자 도읍이라면 그에 맞는 유물이나 왕궁터와 관청지가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기록과도 맞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서 학자들은 몽촌토성과 불과 700여미터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풍납토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 학자건 선뜻 대규모적인 풍납토성 발굴에 나설 수는 없었다. 엄청난 예산과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몽촌토성이 올림픽 시설이 설치되기 이전에 발굴작업을 거치면서 정비되었던 것과는 달리 풍납토성은 보호대책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그래서 대규모 건물과 아파트가 들어서는 등 개발이 진행되는데 이에 대해서 관심깊게 지켜보던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고고학자인 이형구 교수였다. 83년부터 96년 까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로 재직하면서 오늘날 한성백제의 실체에 접근하는데 가장 큰 공로자였다. 특히 올림픽대교가 원래는 풍납토성을 가로질러 갈 계획이었으나 풍납토성의 가치를 예견한 이형구교수가 청와대에 진정을 하는등 노력을 하여서 올림픽 대교는 풍납토성을 비켜가게 하는 설계변경을 이끌어 내었다.

 

그 후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하남위례성터라는 결정적 단서를 확보하는 과정은 너무도 슬픈 우연이자 드라마였다. 1995년 선문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긴 이형구는 풍납토성의 실측조사를 위한 프로젝트를 유치해서 학생들을 데리고 현장조사를 벌이게 되는데 바로 그 자리는 지금의 풍납1동이 현대아파트자리였다. 당시는 이미 두개 동이 들어서 있었고 추가로 7개 동을 짓기 위해서 터파기 공사를 하고 있었다.

 

이 때 상황을 이형구 교수가 KBS와 인터뷰한 내용을 그대로 옮겨본다.

 

"터파기 한 밑에층까지 들어갔는데 위에서 한 5미터쯤 팠어요. 깊이 팠어요. 그런데 한 5미터 4미터 그 사이에서 목탄층, 재가 탄 목탄층이 보이고 그 부근에서 토기편이 막 널려 있어요. 기와편도 있고. 그걸 주머니에 있는 대로 집어넣었어요. 경비는날 들여보내고 잠깐 한눈 파는 사이에 그걸 주머니 있는 데마다 내 눈짐작으로, 요 층에서 난 거는 아래 주머니에다 위층에서 난 거는 윗주머니에다 넣고 이렇게 해서 있는 대로 다 주머니에 넣고 부랴부랴 소형카메라로 사진 찍고 그러고 급히 나왔지요.

 

흥분이 아니라 이거는 어디 산에 올라가서 진공상태에서 귀가 먹먹한 진공상태에서 붕 뜬 그런 기분을 내 느꼈어요. 그래서 그거를 야, 이거 흥분도 되고 조사한 것 사진 찍고 가라앉히고 내 가까운 사람들한테 알렸어요, 문화재청에. 그 당시 문화재관리국이지 관리국이나 문화재 연구소 몇몇 사람한테 알리면서 이거는 중지시켜라 중지 시켜야 된다, 이건 백제 왕성유적이다, 나는 계속 첨부터 왕성유적이다 그랬거든. "

 

그 직후 이형구 교수는 문화재청에 긴급연락하여 아파트 공사는 중단되었다. 그래서 긴급 발굴조사단이 발족하면서 본격적인 초기 한성백제의 왕궁터인 풍납토성에 대한 발굴 작업이 들어가게 되었다. 발굴과정에서 실로 엄청난 내용들이 속속 들어나기 시작했다. 지하 6미터 지점에서 기원전후 시점에선 매우 드문 기와조각과 토기 파편이 나오는데 기와조각 자체가 벌써 엄청난 성과이다. 또한 목탄을 탄소 방사성동위원소 조사결과 그 시점이 바로 기원전후 초기 한성백제의 시기와 정확히 일치하였다.

 

뿐만 아니라 풍납토성 성벽 이전에 있었던 환호시설인 해자가 무려 3겹으로 둘러싸는 이른바 3중환호시설도 발굴되었다. 이건 분명 지금의 성보다 앞선 단계에 거기에 마을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래서 나아가서 그 삼중환호 시점이 언제였는가를 판단할 수 있으므로 해서 풍납동 토성의 성벽이 과연 언제 쌓였는가까지도 알 수 있는 그런 단서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백제는 전라도, 아니면 충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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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설명 : 삼국시대 초기 백제의 영역. 백제는 미추홀(인천)에 나라를 세운 비류백제와 한산(서울)에 터를 잡은 온조백제가 합쳐진 것으로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 그 후 마한을 병합하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흐른뒤였다.

 

 

이상하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라하면 경상도를 그리고 백제하면 전라도를 연상한다. 그래서 그런지 흥행성공했던 황산이라는 영화에선 백제군은 모두 진한 전라도 사투리를 사용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하긴 필자도 그중 하나였다. 80년대 송파동 일대가 개발되면서 생긴 도로중엔 백제고분로라는 길이 있다. 그 길을 다니면서도 별 관심이 없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것이다. 서울 한복판에 백제 고분로라니 이것은 뭔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 든다. 신라 경주나 부여 사비성은 자연스러운데 서울 한복판에 백제고분로는 좀 어색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백제하면 황산벌전투처럼 사비백제를 먼저 떠올려서 그런 것 아닐까?  여기까지 말하면 그래도 좀 공부했다는 사람들은 황산벌 전투에서 백제장군 계백은 충청도 사투리를 써야 맞다고 말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황산벌 전투당시의 백제의 중심은 오늘날 충청도일대니까 말이다.  이런식으로 백제는 무녕왕능이 발견된 공주나 황산벌의 사비백제를 연상하기가 쉬운데, 백제를 서울로 연결짓는 것이 선뜻 안되는 것은 그만큼 한성백제의 존재가 우리에게 너무도 멀리 느껴져서 일게다.

 

여기서 숫자계산 좀 해야겠다. 필자도 숫자를 무척 싫어하는데 이 계산만큼은 좀 해야겠다.  온조가 나라를 세워서 개로왕때까지 백제의 수도는 엄연히 지금의 서울이었다. 무려 5백년 가까운 세월이었다. 그리고 공주로 옮겨간 웅진백제는 100년도 안되는 무척 짧은 기간이었고 성왕때 지금의 부여인 사비백제도 120년 남짓이다. 그런데도 백제는 전라도나 충청도라고 말하면 한성백제가 무척 서운할 것이다.

 

정확하게는 다음과 같다.

 

* 한성백제 (기원전 18년 ~ 서기 475년) 웅진백제 (476년 ~ 538년) 사비백제 (538년 ~ 660년)

 

   

  고구려의  백제 위례성 공략 추정

 

 

삼국사기 기록은 475년 당시 한성백제의 패망을 이렇게 적고 있다.

 

 

진사왕 7년 봄 정월에 궁실을 중수하고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서 이상한 짐승과 화초를 길렀다

 

개로왕 21년 가을 9월, 고구려 장수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와서 도성을 에워싸므로 왕이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못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이 네 길로 나누어 협공하고 바람결을 따라 불을 놓아서 성문을 태웠다.

 

이 기록을 통해서 유추를 해 볼때 몽촌토성은 삼국사기 기록과 맞지 않았다. 그 이유는 만일 산성이라면 고구려군이 네 길로 나누어 완전 포위하여 공격한다는 것이 군사적 관점에선 어렵기 때문이다. 또 진사왕 때의 기록에도 부합하자면 백제의 왕성은 평지성이어야 한다. 몽촌토성은 산성인데 산성에 산을 만든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따라서 풍납토성이 왕성으로 추정을 해야 한다. 바람결을 따라 불을 놓아서 성문을 태웠다는 내용 역시, 서해안의 바람을 쉽게 받아들여서 글자 그대로 ‘바람들이’인 풍납토성이어야 맞아 들어간다는 이유이다. 풍납동(風納洞)이라는 말 뜻이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강변에 위치하고 있으니 얼마나 바람이 잘 들건인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림 설명 : 장수왕의 고구려군의  한성백제 공략 예상루트.

 

   고구려군은   기습의 효과를 달성하기 위해서 한강을 건너는 시기는 야밤을 이용했을 것으로 필자는 추정한다.  왜냐하면  대낮에 도강을 할 경우  백제군에 쉽게 들킬것이고 그러면 기습의 효과를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      고구려군의 침공루트를 군사적 관점에서 추정해 본다면  제1루트는 아차산성쪽이 있는 곳에서  도하하는 지점인데 이곳은 예로부터 한강을 건너다니던 광나루 바로 그곳이다.  또한 광나루는 당시 한성백제가 서해로 나가는 항구역할을 하던 곳이었으니 고구려군이 이곳을 기습선점하는 것은 공격의 제1과제였을 것이다. 또한 한강변은  모래사장으로서 고구려군의 기동과  주둔지로서 전혀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루트는 우회기동루트로서 한강하류에서 이미 도강하여  한성백제 위례성의 서쪽과 남쪽을 공격 차단하는 루투이다.  강남 삼성동엔  백제의 토성이 있었는데 그곳이 한성백제 방어의 전초기지였을 것이다. 당연히 고구려는 그곳을 통과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석촌호수가 있는 곳은 과거에 송파나루였고 이 곳은  한강과 탄천이 합류하는 지점이었다.  따라서 고구려군은  한강 하류에서 도강한 다음  탄천의 얕은 물을 지나서  백제 위례성의 배후를 공격하였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특히 강변의 모래사장을 따라 고구려의 기병이 이동하는데는  기습의 효과를 충분히 거두는데 일조를 했을 것으로 본다.  삼국사기 기록엔  7일을 포위공격하다가 바람결을 따라 성문을 태워서 점령했다고 하는데 그 성문은  강변의 바람이 들어오는 성의 서쪽(X표 지점)이 아닐까 판단해 본다.  왜냐하면 날짜가 음력 9월이면 양력으로 10월이다.  이때의 바람은 대체로 서풍이거나 북서풍으로 바뀌는 시점이다. 따라서  바람결을 이용하여 성문을 태울 수 있는 곳은 성의 서쪽에 해당한다고 추정하기 때문이다.

 

한성백제축제

 일러스트 : 풍납토성의 한성백제시절 상상그림. 풍납토성의 동쪽성벽쪽은 광나루와 연결되어 있다.

백제는 광나루를 통해서 한강을 뱃길로 이용하여 서해바다로 나가서 왜열도와 해상교역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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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1920년대 당시의 송파 나루 . 마포의 황포돗배의 바로 그 돗배가 송파나룻터에도 있었다.

 

군사적 관점에서  볼때  고구려군은  위례성을 포위공격하는데 있어서  백제 몽촌토성과의 연결성을 차단해야만 한다. 따라서  고구려군의  주력군은 아차산성에서 넘어오는 A쪽보다는 한강하류에서 도강하여 위례성의 서쪽지역을 공략한 B방면군이라고 판단해 본다.  B방면에서 공격하면  위례성의 서쪽지역과 남쪽지역을 공략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몽촌토성의 백제군을 차단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백제군은 아차산성에서 건너온 고구려군의 양동작전에 휘말려서  성의 서쪽지점에 취약성을 보였을 것으로 가정해본다. 왜냐하면 성의 남쪽은 몽촌토성과 연결되는 곳으로서 상대적으로 백제군이 우위에 있을 수 있는 지역인 반면에 상대적으로 성의 서쪽지역은 취약했을 것으로 본다. 원래  공격자는 가장 취약한 곳을 통해서 들어가기 마련이다.

 

특히  한강 도강은 과거나 현재나 그 지점이 크게 다르지 않다.  마포나루, 한남나루,뚝섬나루,광진나루가 예로부터 한강을 거너는 주 통로였다.  

  

이렇게 고구려군이  서쪽과 북쪽에서 한성위례성을 공략할 때  백제 개로왕은  성의 남문을 통해서 몽촌토성으로 급히 피난했다가  나중에 고구려군에 사로잡히는 것이 역사의 기록이다.   

 

 

 

군사적 관점에서 본 방어시설의 변천과정.

 

목책-해자와 토성(土城)-石城-山城

 

인간은 집단생활을 통해서 타집단과 끊임없는 전쟁을 해온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과정에서 방어시설이 필요한데 그 대표적인 시설이 바로 성(城)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성을 만들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인류가 제일 처음 사용한 방어시설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목책이다. 나무를 잘라서 주거시설을 에워싸는 목책이 첫번째의 방어시설이었다. 이런 시설은 청동기시대 유적지를 통해서도 확인되는 사실이다. 이런 목책은 비단 외적 뿐만 아니라 싸나운 맹수로부터의 방어시설이기도 하였다.

 

그것이 발전해서 나온 것이 바로 환호라고 불리는 해자(垓子)이다. 땅을 파고 그 안에 물을 채우는 것이 해자이다. 땅을 파면서 나오는 흙은 자연스럽게 토성 역할을 하게 된다. 바로 이런 과정을 거친 곳이 한성백제의 풍납토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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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오사카성과 해자. 해자는 방어기능으로선 매우 유용하다. 특히 일본 전국시대 성은 해자와 그 방어기능이 철옹성이라 할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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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1600년대에 축성된 덴마크 코펜하겐의 카스렛城이다.  극단적인 해자의 방어기능을 최대한 살렸다. 

 

 

그 다음 성을 더 견고히 하기 위해서 토성주위에 바위나 돌맹이로 보강하거나 처음부터 석성을 쌓기도 하면서 방어시설이 변천해 갔다. 그러나 평지는 적의 침입을 받기 쉽기 때문에 지리적 이점을 얻기 위해서 산에 성을 구축하면서 산성이 되는 것이다. 대체로 그런면에서 풍납토성은 도읍으로서 평지성이었고 몽촌토성은 군사적목적의 산성이다.

 

   

풍납토성은 방어시설의 변천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군사적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유적지이다. 일본을 여행해보면 많은 일본의 성곽시설을 보게 된다. 거기엔 항상 대규모적인 해자시설이 있다. 지금도 해자와 토성의 방어시설은 현대전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대부분의 군사비행장은 지방하천으로 둘러싸여 있다. 자연적인 해자역할을 하천이 하고 있고 그런 하천유역의 평탄한 곳에 대부분의 비행장이 건설되어 있다. 그만큼 해자는 군사방어시설로서 수천년전이나 지금이나 유용하다는 반증이다.

 

실제 청주지역엔 장수왕의 남정때 최남단의 토성유적과 더불어서 목책흔적이 남아있다.(사진)

 

 

 

풍납토성의 탄생과 멸망 그리고 재탄생

 

 

백제의 건국에 대해선 아직도 여러 설(說)이 있다. 비류백제니 온조백제니 또 한편에선 대륙백제설까지 나온다. 백제의 요서지방과 산동지역진출설과 대륙백제설을 혼동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대륙백제설은 백제의 건국이 한반도가 아니라 만주대륙이라는 이야기인데 지금은 그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떻든 부여족에서 나온 한 갈래는 고구려를 세우고 그 고구려에서 또다시 분기되어 백제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대충 다들 아실 것이다. 기록에 보면 비류계는 미추홀(인천)에 나라를 세우고 온조계는 한성에 나라를 세웠는데 후에 비류계가 온조계에 흡수된 것으로 말한다. 그 온조가 나라를 세운 곳이 바로 지금의 서울땅이다.

 

그 기록은 이렇다.

 

 

 

비류와 온조는 한산에 도착하여 부아악(인수봉)에 올라가 거주할 만한 곳을 찾았다. 열 명의 신하들이 말했다. 이 곳 하남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바다가 막혀 있습니다. 이 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한수 남쪽[河南]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 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서기전 18)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수 없어서 위례(慰禮)에 돌아와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도 평안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에 귀부(歸附)하였다.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에 가서 터를 잡았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그리고 백제본기 온조왕 13년 조엔 이렇다.

 

온조왕이 말하길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 그들이 우리의 변경을 자주 침공하여 편안한 날이 없었다. 더군다나 요즈음에는 요사스러운 징조가 자주 보이고, 어머님이 세상을 떠났으며, 나라의 형세가 몹시 불안하다. 그러니 도읍을 옮겨야겠다. 짐이 어제 순행하는 중에 한수의 남쪽을 보니, 토양이 매우 비옥하였다. 그러니 그 곳으로 도읍을 옮겨 영원히 평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워야겠다.

 

이렇게 해서 온조왕이 하남위례에 성을 세웠다는 이야기다. 그 후 개로왕때인 서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고 한성백제는 멸망하면서 백제는 공주와 부여로 수도를 옮기게 되었다. 그런데 삼국유사는 하남위례성의 위치를 천안의 직산지역이라고 하고 있다. 그후 한성백제의 한남위례성은 까맞게 잊혀져 있다가 조선후기 실학자들에 의해서 되살아 나기 시작했다. 실학자의 대표격인 다산 정약용은 하남 위례성을 하남시의 춘궁리일대로 보았다. 이렇듯 한성백제의 하남 위례성터는 어딘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일제시대

    

사진 : 을축년인 1925년 대홍수때 무너진 풍납토성의 서쪽 성벽

 

 

1925년 7월 대홍수가 났다. 이를 두고 을축년 대홍수라고 하는데 이때 풍납토성의 서쪽 벽이 허물어 지면서 청동솥과 유리구슬이 세상밖으로 나왔다. 이 을축년 대홍수가 얼마나 컸던지 지금의 잠실일대의 지형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탄천과 그 지류가 바뀌면서 새로운 하천이 생기면서 그 연유로 지금의 동네이름인 신천(新川)동이 되었다. 이때 나온 청동솥은 초두(鐎斗)는 제사용 그릇으로 아무데서나 사용하는 물건이 아니다. 또한 유리구슬은 삼국시대 귀족들의 장신구이다. 그러자 풍납토성에 대해서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는 초두가 출토된 곳에다 나무 표식을 세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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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4년에 일본학자 아유카이(鮎貝房之進)는 출토된 유물들을 근거로 풍납토성을 삼국사기에 나오는 하남위례성이라고 최초로 지목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조선총독부는 풍납토성의 중요성을 인정해서 이 인정 되어서 1936년에 고적으로 지정하였다.

 

 

그러자 일본학자의 풍납토성이 위례성일 것이다라는 주장에 반기를 든 학자는 이병도 박사였다. 이병도 박사는 풍납토성을 왕성으로 보지 않고 사성(蛇城)인 군사방어성으로만 본 것이다. 이병도 박사는 다산 정약용 선생과 같이 하남 춘궁리일대를 한성백제터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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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풍납토성내 유적 발굴에 대한 항의하는 주민들의 현수막.

 

그 후로도 풍납토성은 80년대 개발을 하기전까지 그대로 있었다. 문제는 고적으로 지정된 것이 토성만이었고 토성안은 지정되지 않은 관계로 그대로 개발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아파트가 들어서는 공사를 하다가 풍납토성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문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아파트 입주민의 격렬한 반대였다. 발굴조사로 아파트 건설이 지연되면서 입주예정주민들이 곤란해 진 것이다. 이로 인해서 역사의 발굴과 주민의 재산권 행사라는 사항이 정면으로 부딪히게 되었다. 어찌보면 한성백제멸망후 풍납토성의 또 다른 시련이라 볼 수 있다. 그렇게 해서 풍납토성은 일부만이 발굴되고 그대로 아파트와 주택건설은 계속되었다. 지금 풍납토성안의 주민들은 한성백제성터에 살고 있는 셈이다.

 

 

 

놀라운 풍납토성의 구조와 한성백제 전성기

 

 

 

풍납토성은 둘레가 약 3.5km, 밑변이 30~40m, 높이가 15m, 넓이 약 26만평으로 현존하는 토성 중

우리나라에선 가장 큰 규모이다. 특히 그 축성법은 놀랍다. 그냥 흙을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채로 쳐서 고운 흙을 한층 한층 다져올린 방대한 규모의 토성이다. 밑변이 40여미터에 높이가 15미터의 규모인데 그 시기가 3세기 이전에 만들어 졌으니 더더욱 놀랍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인원이 동원되었을까? 한밭대 토목공학과에서 시뮬레이션 기법으로 추정한 것은 연인원 백만명이 동원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흙의 양은 150만톤이라 한다. 10톤 트럭으로 옮겨도 15만대나 필요한 물량이다.

 

수치해석학적 분석이 아니고서라도 그런 규모의 성곽이 조성되려면 많은 인력이 필요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 백제는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인력을 동원할 수 있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백제 멸망당시의 인구를 중국측 기록은 76만호라고 하고 있다. 고구려는 67만호로서 백제의 인구가 고구려보다 많다고 적고 있다. 660년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에 함락할 당시 76만호라면 한 가구당 5명씩 쳐도 그 인구는 400만명이 안된다. 그렇다면 풍납토성이 만들어질 당시 기원전후부터 3세기까지 한성백제의 인구는 그보다 훨씬 적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대규모의 성을 축성할 수 있었다는 것은 국가권력이 백성을 동원할 수 있는 고대 전제국가체제가 일찌감치 성립했다고 유추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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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 풍납토성(위례성) 구글 위성 그림.  1-4세기 이정도의 규모는 한반도에선 최대규모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책계왕(責稽王)때는 이런 기록이 있다.

 

채계왕 0 년 (AD 286) :

왕은 장정들을 징발하여 위례성(慰禮城)을 보수하였다.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정벌하자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청했다. 이에 앞서 왕은 대방왕(帶方王)의 딸 보과(寶菓)를 맞이하여 부인(夫人)으로 삼았기 때문에 “대방과 우리는 장인과 사위의 나라이니 그 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고는 드디어 군사를 내어 구원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왕은 고구려의 침공과 노략질을 염려하여 아차성(阿且城)과 사성(蛇城)을

수축하여 이에 대비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하남 위례성은 오랜시간을 두고 축성과 보수가 있었슴을 알 수 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고구려와 낙랑 대방과는 적대적 관계이고 백제와 대방은 동맹관계임을 알 수 있다. 고대 국가에서 동맹관계의 증표는 바로 왕족간의 혼인관계로 대표되는데 대방과 백제는 장인과 사위관계였으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군사적으로 해석하면 고구려가 낙랑을 멸망시키고 대방을 압박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백제쪽으로 피난을 내려오면서 한성백제에 많이 유입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고대국가에선 인구는 곧 군사력과 경제력등 국력에 직결된다. 따라서 고구려의 남진으로 밀려 내려온 낙랑 대방의 사람은 백제인으로 편입되고 이들은 자연스럽게 성곽축조에 동원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게 인구가 늘어나고 군사 경제적으로 성장한 백제는 마한을 흡수하면서 급기야 근초고왕땐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기까지 하였다. 학자들은 이때를 백제 최전성기로 꼽고 있다. 한성백제의 멸망후 한강일대를 차지한 고구려는 최전성기를 누렸다. 그후 한강유역을 차지한 신라 진흥왕때를 신라의 최전성기라고 부른다. 이렇게 오늘날 서울지역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핵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공주와

  그림설명 : 한성백제 이후 웅진백제의 공주, 그리고 사비백제의 부여의 백제 도성그림이다.  그 구조는 풍납토성처럼 굽이쳐 흐르는 강을 자연해자로 삼고 도읍을 정했는데 한성백제와 그 구조면에서  기본적으로 같다.

 

 

 

 

 

서울은 조선시대 한양으로서 조선 600년간 수도서울역할을 하였다. 그렇다면 한성백제 400여년과 조선시대 600년 도읍을 합하면 무려 1천여년의 수도서울인 셈이다. 오늘날 현재도 한나라의 수도이면서 1천년간 수도였던 나라는 극히 드물다. 굳이 꼽아본다면 그리스 아네네와 이태리 로마정도 아닌가 한다. 가까운 북경도 원나라때부터 수도였고 일본의 동경 또한 수도로서 기능은 극히 짧다.

 

한성백제의 수도 하남위례성은 한성백제 멸망후 잠자고 있다가 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해서 다시 세상에 나왔고 서울 올림픽은 바로 그 옛날 한성백제의 수도 위례성일대에서 열렸으니 한성백제는 88 서울올림픽으로 부활한 셈이다.

 

이 글을 통해서 한성백제와 수도서울의 역사성을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2013년 06월28일 01시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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