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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 패튼(4)

[ 고전 속 명작 ]

 

패튼 ( PATTON ) - 4

 

해설 : 유진우

 

 미군 창설 이래 첫 전차부대의 실전을 앞두고 패튼 중령은 전 장병들을 집결시킨 자리에서 일장훈시했다.
  “미군의 전차는 절대 적에게 항복하지 않는다. 적이 나타나면 귀관의 무한궤도로 과감하게 짓밟아버려라. 이번 전투는 우리 여단에게 다시 없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귀관의 전차가 멈춰선다면 주저하지 말고 차량에서 뛰어내려 보병들과 같이 돌격해라. 만약 보병보다 뒤처지는 이들이 있다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본문 中 -

 

 

군기 반장
  패튼 대위는 새롭게 창설된 전차부대의 군기를 완강하게 잡음으로써 부대의 규율을 확립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임을 강조했고 실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무리는 아니었다.

  우선 불과 몇 주전까지만 해도 아직 민간인의 “때”를 완전히 벗겨내지 못한 병사들에게 확고한 군인정신을 불어넣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패튼 대위는 우선 신참 장교들부터 ‘잡기’시작했다.

  이에 따라 새롭게 전입된 소위들은 행정반이 아닌 난데없는 건설현장에 투입돼 작업용 연장을 쥐는 혹독한 신고식을 치러야했던 것인데 이들의 임무는 다름아닌 조만간 도착할 신병들을 위한 병영의 막사, 각종 창고, 그리고 제1기생을 훈육할 강당을 짓는 일이었다.

 

  귀족 출신이 대다수를 이뤘던 독일군보다 더 권위적이면서 장교와 병사를 구분짓는 계급제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강조한 패튼 대위는 장교의 특권은 다름아닌 주어진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함으로써 결정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따라서 신참 소위들은 병사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주어진 작업을 무조건 완수해야했고 혹독한 패튼의 독려 속에 공사가 완료될 수 있었다.

  그리고 곧 소령으로 진급하는데 성공한 패튼은 새롭게 배치된 훈련병들을 대상으로 무자비한 지옥훈련을 실시했다.

 

  패튼 소령은 강당에 집결한 훈련병들 앞에서 화려한 언변으로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며 열강했고 중요한 사항은 신병들 앞에서 자신의 손과 군복을 더렵혀가면서까지 직접 시범을 보이는 등 오늘날 훈련 부사관( Drill Sergeant )에 버금가는 활약을 펼쳤다.

 

  덕분에 패튼 휘하의 제1기 전차 훈련병들은 1일 12시간, 1주일에 6일을 교육훈련에 전념했지만 일요일에도 편안한 휴식은 꿈에도 꿀 수 없었다.

  바로 교장 패튼 소령이 정해놓은 기준에 부합하도록 군복과 장비를 손질하는 개인정비에 대부분의 일과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이었는데
  아무리 교육훈련이 훌륭하게 수행되더라도 정작 실제 전차를 이용한 실전과 같은 훈련이 결여되었다면 말짱 도루묵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전차학교가 설립된 이래 몇 주 동안 훈련용으로 사용할 전차가 단 한 대도 없다는 것이 패튼 소령의 최대 딜레마였다.

  이는 당시 전차를 공급해줘야할 프랑스가 생산되는 모든 르노 FT-17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전선으로 투입하는데 정신이 없었던 탓이 컸다.

 

 

  그렇다고 전차를 개발해 본 적도 없는 미국 본토에 기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전차학교의 훈련병들은 차량이 없는 상태로 이론 강의와 엄정한 군기확립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1918년 3월 23일, 마침내 그토록 원하던 전차 10대가 배치되었고 4월 중순, 드디어 미 육군 최초로 전차부대에 의한 야지 기동훈련이 실시되었다.

  평소 훈련 부사관보다 더 악랄한 패튼 소령의 훈육으로 단련된 전차병들이 조종하는 전차들의 기동훈련은 매우 성공적으로 끝났고 이 공로로 패튼은 불과 2개월 만에 중령으로 진급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훈련을 마친 후 복귀하는 전차들을 바라보며 패튼은 이제 단순히 영국과 프랑스군의 보조역할을 맡고 있는 미군이 단독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야심을 품게 되었다.

  이는 윌슨 대통령이나 원정군 사령관 퍼싱의 의도와도 정확하게 일치하는 부분이었는데 당시 독일군의 대규모 공세로 인해 영국군의 방어선이 급격하게 붕괴되며 파리 근처까지 위태로워진 상황에서 미군이 반격을 가해 전장의 주도권을 확립하는 한편 승전 이후 유럽중심의 힘의 질서를 미국 중심으로 개편한다는 것이 그 복안이었다.

 

  그리고 1918년 여름에 이르러 패튼 중령은 결정적인 기회를 잡게 되었다. 미 제1군이 생 미엘( St.Mihiel ) 지역의 독일군을 격멸하는 임무를 담당하게 된 것!

 

  하지만 정작 임무를 부여받은 미군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사실이 있었는데 바로 이 지역이 1914년 독일군이 장악한 이래 이렇다 할 교전이 별로 없었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이 지역은 훗날 독일군의 라인 수비 작전이 발동한 아르덴느 지역과 같이 전투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은 사단과 군단이 재편성을 위해 배치되는 일종의 휴양지와 같은 곳이었기에 패튼 중령은 분통을 터뜨리려다가도 몇 차례를 자제해야 했다.

 

  이는 아직 제대로 된 실전경험이 없는 미군을 못미더워한 영국과 프랑스군 지휘부의 농간이기도 했고 덕분에 승리를 거둔다 해도 그렇게 큰 주목을 받기는 힘겨웠다.

  그러나 퍼싱과 군사령부의 참모장교, 그리고 예하부대는 생 미엘 탈환작전을 성공리에 수행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며 작전수립에 착수했다.

  패튼 중령은 새롭게 편성된 제1 전차여단장에 보직되었고 마침내 그가 그토록 원했던 철갑기병대의 지휘권이 손에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제1 전차여단은 생 샤몽보다는 비교적 상식적인 프랑스군의 슈나이더 전차의 지원을 받는 제326, 327 전차대대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비록 2개 대대에 불과했음에도 연료와 엔진오일 등 핵심적인 군수물자 확보에 각 보병사단과의 시비가 붙음은 물론 정작 차량을 후송해줘야 할 프랑스군 기관차와 화차의 확보가 용이치 않아 참모장교들이 그야말로 발품을 팔아야 할 정도로 공격준비는 순조롭게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열차의 확보가 용이치 않은 문제점이 결정타로 작용해 제1 전차여단의 르노 FT-17이 전선 후방에 도착한 것은 8월 말이었고 이렇게 어렵게 하차된 차량들을 전선으로 이동시키는 것도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

 

 

  망신스런 첫 실전

  미군 창설 이래 첫 전차부대의 실전을 앞두고 패튼 중령은 전 장병들을 집결시킨 자리에서 일장훈시했다.

 

  “미군의 전차는 절대 적에게 항복하지 않는다. 적이 나타나면 귀관의 무한궤도로 과감하게 짓밟아버려라. 이번 전투는 우리 여단에게 다시 없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귀관의 전차가 멈춰선다면 주저하지 말고 차량에서 뛰어내려 보병들과 같이 돌격해라. 만약 보병보다 뒤처지는 이들이 있다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훗날 여단의 장교는 당시 패튼 중령이 “전차부대 장교는 당연히 전사할 것을 각오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술회했다.

 

  문제는 패튼 중령의 살기등등한 일장훈시도 차량들을 운반해줄 프랑스군 철도당국의 일정표를 바꿔놓지 못했다는데 있었다.

 

  공격개시 2시간 전에야 가까스로 마지막 전차가 화차에서 하차완료 되었을 정도로 답답한 상황이 지속되었고 여단의 마지막 전차대가 공격 대기지점에 도착한 것은 딱 10분을 남겨놓았을 때였다.

  그리고 첫 실전은 그야말로 영국군이 솜 전투에서 보여줬던 것 이상으로 망신스럽게 시작되었다.

  미군과 대치하고 있던 막스 폰 갈비츠 장군 예하 독일 제5군은 전선을 축소해 효과적인 방어전을 수행하고자 했고 이에 따라 적잖은 참호선이 버려졌다.

 

  문제는 이미 캉브레 전투를 겪어본 독일군이 퇴각하며 전차가 쉽게 통과하지 못하도록 참호의 폭을 보다 넓혀놓았다는 점!

  덕분에 덩치가 작은 르노 FT-17 경전차와 후방에서 지원하기 위해 진격하던 슈나이더 전차대는 곧바로 참호선에서 돈좌되고 말았다.

 

  쉴 새없이 날아드는 독일군의 기관총탄과 포탄 세례를 뒤집어 쓰며 미군과 프랑스군 전차병들은 참호를 극복하기 위해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했고 가까스로 진격을 재개하는데 성공했지만 애당초 이런 돌발상황을 예상치 못한 미군 조종수들의 미숙한 기량만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전차대의 난관 못잖게 패튼 중령은 전투 개시 2시간 동안 통신 장애에 시달렸는데 바로 전차에 통신장비가 전혀 장착되지 않았던 것!

 

  제2차 세계대전 초반 독일 기갑부대가 성능상으로 우위에 있던 영국, 프랑스군 전차대를 상대로 나름 선전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인 통신 장비가 이 시기 전차에는 전무했던 탓에 패튼 중령은 명령을 내리려면 해당 지휘관 전차의 차체를 “쾅! 쾅!” 두들겨야만 했다.

 

  그것도 독일군의 치열한 탄막사격이 빗발치는 상황에서 수행했으니 패튼의 담력이 얼마나 대단한 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물론 패튼 중령도 사람인지라 날아드는 탄환을 피하려 했지만 곧 부질없는 짓이며 부하들의 사기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에 당당하게 행동했고 그 와중에 제84 보병여단장이었던 맥아더 준장과 조우한 정도가 심리적으로 위안이 된 부분이었다.

 

  한동안 도보로 행군하다시피 전차부대를 따라간 패튼 중령은 곧 독일군이 지뢰를 매설했다고 잘못 알려져 애를 먹였던 교량에 도달했다.

  그야말로 자신이 그토록 갈망했던 호쾌한 기병대의 임무를 시작할 찰나였지만 문제는 이를 지원할 보병들이었다.

 

  전투 개시 초반의 자신만만했던 모습은 예상 외로 완강한 독일 제5군의 방어진지들을 점령해가는 와중에 점차 누적되는 피로로 찌들어갔고 공격을 지휘하던 장교와 부사관들이 대거 전사해버리는 바람에 그저 무의식적으로 전차를 뒤따르기만 했던 것이다.

 

 이를 지켜보는 패튼 중령은 다시금 답답한 심경을 억누르며 보병들에게 전차를 바짝 따라붙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전차대가 다음 촌락의 시가지로 진입하기가 무섭게 독일군의 기관총이 불을 뿜었고 완전히 노출돼 있던 패튼 중령은 황급히 전차에서 뛰어내려 근처의 포탄 구덩이로 몸을 숨겼다.

 

  갑작스런 독일군의 기습공격에 전차는 신속히 진격을 계속했지만 정작 이들을 지원해야 할 보병들은 뤼순 전투 당시 일본군 보병들처럼 꼼짝도 못하는 상황!

 

  더욱 큰 위기는 바로 패튼 중령 본인이 엄폐한 포탄 구덩이 주변으로 독일군의 맥심 기관총 4정이 포위하듯 화망을 구성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패튼 중령으로서는 어떻게든 앞질러나간 전차들을 되돌리는 수밖에는 해결책이 없었다.

  그는 가까스로 기관총 탄막을 피해 보병들이 엄폐한 지점까지 돌아와 즉각 해당 지휘관에게 전차를 되돌리도록 전령을 보낼 것을 지시했지만 자신의 휘하가 아니니 그럴 수 없다는 냉담한 반응만 받았다.

  결국 자신이 직접 전차를 돌려야겠다고 결심한 패튼 중령은 전속력으로 내달려 가까스로 따라잡을 수 있었는데 보통 인간으로서는 쉽사리 시도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가까스로 전차들을 되돌린 패튼 중령은 오후 내내 예하 부대들을 진격시키며 다른 대대와의 원활한 통신유지를 위해 일선을 뛰어다녔지만 이 때문에 지휘관이 정위치를 무단으로 이탈했다는 명목으로 경고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훗날 패튼은 제3군 사령관으로 유럽 전선에 투입된 상황에서도 유사한 행동을 되풀이하기만 했다.

 

  어찌되었든 초기 휘발유 엔진을 사용한 전차들은 예정대로 극도로 낮은 연비 덕분에 정차하는 일이 빈번했고 이 때문에 휘발유를 확보하기 위해 후방으로 이동하다 되려 독일 공군의 폭격을 맞는 등 생 미엘 전투는 패튼에게 있어 그리 썩 좋지 못한 기억만을 남겨주었다.

 

  하지만 패튼 중령이 제출한 전투 상보를 검토한 사령부는 제1 전차여단이 예상 외로 잘 싸워주었다는 호의적인 평가를 내렸다.

 

  실제 첫 실전에 임한 르노 FT-17 전차들은 독일 제5군의 거센 반격에도 돌격을 멈추지 않았고 이는 몸사리지 않고 전선을 누빈 여단장 패튼 중령의 독전이 적잖은 비중을 차지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문제는 사령부가 부상자 구호에 집중하는 바람에 가장 중요한 전차부대의 군수지원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으로 전투 첫 날, 제1 전차여단의 작전수행에 적잖은 차질을 주었다.

 

  특히 전차부대를 지원해야할 정비병, 트럭 운전병은 물론 취사병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바람에 전차병들이 적잖은 애를 먹었고 패튼 중령 역시 부대를 지휘하는 것 못잖게 이들을 집결시키는데 상당한 시간을 허비해야했다.

 

  어찌되었든 가까스로 집결시킨 정비병들의 노고 덕분에 9월 16일, 제1 전차여단은 보유전차 150대 중 131대가 가동상태를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생 미엘 전투에서 승리한데 고무받은 퍼싱은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인 뫼즈-아르곤 일대에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퍼싱의 초기 공세복안은 우선 독일군의 정면 방어선을 돌파해 몽코퐁 주변 고지의 양측에서 종심 방향으로 깊숙하게 치고 들어가면 두 부대가 합류해 주 방어선인 크림힐데( Kriemhilde )를 집중 공략하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문제는 이 복안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공세 첫 날 최소 16km를 전진해야한다는 전제조건이 달려있었다.

 

  여기에 생 미엘과 달리 뫼즈-아르곤 지역은 기복이 심한 지면과 울창한 삼림지대 덕분에 방어하는 독일군에게 기막힌 이점을 제공하고 있어 미군 참모장교들의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

  퍼싱으로서는 생 미엘보다 훨씬 더 어려운 전투가 될 것이며 베르됭 전투 당시 프랑스군이 냈던 사상자를 상회하는 피해가 발생할 것까지 각오해야 했다.

 

  당시 미군에는 레인저나 델타 포스와 같은 특수전 부대가 없었기에 퍼싱은 대규모 보병사단을 투입해 이 지역을 공략하기로 결정했다( 솜 전투 당시 영국군이 이런 방식을 시도했다가 보기 좋게 당한 전례가 있음에도 )

 

  공세에 동원된 보병사단은 총 9개라는 상당히 만만치 않은 규모였고 패튼 중령의 제1 전차여단은 제1 군 예하 28, 35 보병사단을 지원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펜실베니아 주 방위병들을 근간으로 창설된 제28 보병사단은 아르곤 삼림의 동쪽 가장자리를 따라 진격하고 캔자스와 미주리 주 출신이 근간이 된 제35 보병사단은 개활지를 횡단해 공격할 예정이었다.

  명령을 수령한 패튼 중령은 우선 지형 정찰을 실시했다. 전차의 가장 양호한 접근로는 아르덴과 세피( Cheppy ) 사이에 위치한 촌락의 동쪽에 위치한 폭 2.5km의 숲지대였다.

 

  정찰을 마친 패튼 중령은 제344 전차대대( 제326 전차대대와 같은 단대호의 전차대대가 미 본토에서 편성되자 패튼 중령이 변경 )의 2개 중대를 제35 보병사단에 배속시키고 1개 중대는 제28 보병사단에 배속시켜 작전을 지원하도록 조치했다.

  하지만 여단에 지원 배속된 프랑스군의 슈나이더 전차는 패튼 중령 본인부터 못미더워했던 탓에 일단 예하 대대가 위기에 처하면 지원을 요청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 당시 패튼은 아직 본격적인 현대 전차전의 기본 개념이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차 운용에 있어 주도면밀한 판단에 따라 임무를 할당하는 것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독일군처럼 전차를 한데 집중시키지도 않았다.

  하지만 사전 정찰을 통한 작전지역 내의 지형 파악 및 가용전력의 치밀한 고려 등은 주목할 만한 대목이었다.

 

  특히 생 미엘 전투에서 군수지원의 미흡으로 적잖게 고생한 전훈을 바탕으로 각 전차마다 예비 연료통 2개를 휴대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전차병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정비용 전차를 각 중대마다 1대씩 배치하는 등 준비를 철저히 마쳤다.

  마침내 공격 개시 1시간이 경과한 시점에서 패튼은 야단 본부를 출발해 전방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여단장은 작전 개시 3시간 30분 뒤 선두 전차에 탑승한다. 준비하고 있도록!”

  여단 본부를 출발할 당시 패튼은 장교 2명, 전령 12명과 전서구 3~4마리, 야전 전화기 및 야전선을 챙겨 통신유지에 심혈을 기울였다.

 

  문제는 공세 개시와 함께 미군 포병대가 연막탄을 대량으로 사격하는 바람에 독일군은 물론 아군까지 시야를 가려버렸다는데 있었다.

  패튼 중령과 참모장교들은 전차의 무한궤도 궤적보다는 나침반을 의지해 전진했고 결국 전차부대보다 지휘부가 한참 앞서나가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했다.

 

  비록 미군의 기습공격은 성공해 일시적으로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했지만 안개가 걷히기가 무섭게 거센 반격이 시작되었다.

 

  비록 75mm 야포와 같은 강력한 대전차 화기는 없었지만 덩치가 작은 르노 FT-17에게는 대단히 치명적인 박격포탄이나 13mm 탕크-게베어의 존재는 분명 위협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럴 경우 보병지원이 필수적이었지만 패튼의 전차병들은 배속된 보병사단과 합동훈련을 해본 적이 없었기에 양측의 손발이 전혀 맞지 않는 상황에 봉착하고 있었다.

  

2019년 11월20일 00시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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