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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 패튼 (6)

[ 고전 속 명작 ]

 

패튼 대전차군단( PATTON ) -Act.5

 

해설 : 유진우

 

 “자신을 혹독하게 다그쳐야 한다. 적과 마주치더라고 절대 회피하지 말고 감정을 억누르려 하지 마라. 분노는 전투에 있어 좋은 촉매이니 참을 필요가 없다. 이것이 우리가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비책이다!”
  동료 장교들에게 위와 같이 충고하며 패튼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지휘관은 명석하면서도 우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본문 中 -

 

시작하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패튼은 독일의 군사 사상가나 명장들에 관련된 서적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관심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자신만의 뚜렷한 군사사상을 확립해 나갔는데 그것은 ‘아무리 뛰어난 전략도 빈약한 전술 때문에 실패할 수 있으며 빈약한 전략이라도 뛰어난 전술 덕분에 성공할 수 있다’는 것으로 패튼은 평생 이 신념을 수정하기는 했어도 절대 버리지는 않았다.


  이 시기 패튼은 미국의 군사이론 및 사상 분야에사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 되어온 ‘작전( 作戰 )’을 중시하는 쪽으로 소신을 굳히고 있었는데 때마침 20세기에 진입하던 미국의 군사운용 상의 핵심이 ‘정책’과 ‘전략’이었기에 상호 간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정책과 전략 중시의 핵심은 “언제 어디에 군을 투입할 것이며 현지에서 어떤 방식으로 군을 유지할 것인가?”인데 이는 지극히 행정적인 방향이자 평시에나 어울릴 법한 것으로 전시 군인인 패튼의 사상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부분이었다( 아마 나폴레옹의 기병대장 요아킴 뮈라가 패튼 스타일이 아니었을지도? )


  아니나 다를까 당시 미국의 행정적인 집착도는 자연 실전전투에 대한 준비미흡으로 인해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독일군으로부터 아주 혹독한 수업을 받아야만 했다.
  이 때문에 패튼은 줄기차게 ‘실전 전투에 적용할 수 없는 전략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무용지물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게 되었다.


  그가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된 것에는 전장에서의 지휘 신조 때문인데 훗날 북아프리카에서 대결을 펼치게 되는 독일군의 에르빈 롬멜 원수와 더불어 비록 전형적인 보병 돌격과 전차 돌격이라는 상이한 방식의 전투경험을 했지만 공통적으로 터득한 원리가 있었다.
  “병사와 장비는 단순히 머릿수와 기술력의 결정체가 아니다. 이들을 단순히 문제 해결의 수단과 방법으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전쟁의 황금률은 속도, 간단명료함, 대담성이고 패배를 인정하기 전에는 절대 패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함부로 패배를 자인해서는 안 된다. 전쟁은 혈투를 의미하고 적을 죽이는 것이지 참호나 파며 방어진지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다. 부하들의 사기를 드높이고 그들에게 싸워야할 자긍심을 심어줘라. 국가를 위한 헌신적인 희생의 길을 오직 이 것뿐이다.”


  포트 마이어에서 근무하던 시절 패튼은 자주 위의 문장을 굵은 글씨체로 노트에 기입해 두었고 강의 때마다 “전쟁에서의 성공은 적절한 시기에 적재적소에 있는 것!”이라 강조했다.
  덧붙여 기병장교는 모름지기 강인한 육체와 정신으로 무장함과 동시에 도박사의 과감함과 용기를 지녀야 하고 돌격정신을 함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제군들 명심해라. 돌격이라는 말은 쉬워도 막상 나서는 병사는 없다. 반드시 훈련을 거듭해야 한다!”
  이렇게 패튼의 평상시 발언과 행동에서는 점차적으로 장성의 싹이 움트고 있었는데 당대에서 요구하는 장군상은 명확한 비전을 지니고 스스로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자신을 혹독하게 다그쳐야 한다. 적과 마주치더라고 절대 회피하지 말고 감정을 억누르려 하지 마라. 분노는 전투에 있어 좋은 촉매이니 참을 필요가 없다. 이것이 우리가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비책이다!”
  동료 장교들에게 위와 같이 충고하며 패튼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지휘관은 명석하면서도 우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지휘관들 중 이처럼 자신의 좌우명을 가슴 깊이 간직한 장성은 그리 흔지 않았음을 고려할 때 오랜 전사 및 명장들의 일대기를 탐독하고 실전체험을 통한 가치관 확립을 해온 패튼은 가히 명장의 대열에 끼어도 무리가 없었다.
  1923년 1월을 기해 패튼은 기병학교의 영관장교 보수과정에 입교해 5개월 간 교육을 이수하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그의 생도 시절 학업 컴플렉스를 무색하게 하는 기염을 토했다.
  더욱이 이 우수한 성적 덕분에 캔자스에 소재한 포트 레븐워스의 지휘참모대학에 입교할 수 있는 자격까지 취득하는 행운이 겹쳤다.


  1923년 9월 10일, 포트 레븐워스에 입성한 패튼은 웨스트포인트 시절처럼 낙제하지 않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경주했는데 우선 월요일~목요일까지는 19~21시에 걸쳐 공부하는 대신 그 날 목표로 잡은 학습량을 달성하지 못하더라도 무조건 정해진 시간에 취침했다.


  그는 오랜 공부 끝에 학교에서의 성적이 머리보다는 요령을 어떻게 부리느냐에 따라 달렸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무리한 암기식 공부를 기피했다.
  “답안을 제출하기 전에 학교 원안을 읽어보고 교관과는 절대 논쟁을 벌이지 마라. 또 지문 속에 있는 지엽적인 세부사항에 얽매여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 속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으니까.”
  그 결과 패튼은 총 248명의 입교생 중 25등으로 졸업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교육 기간 중 지휘참모대학에서 공부한 학과 내용을 빠짐없이 기재해 두었다가 1925년, 아이젠하워 소령이 입교한다는 소식을 듣기가 무섭게 그에게 전해주었다.


  선배의 족보( ? )를 통해 보다 수월하게 공부할 수 있게 된 아이젠하워는 패튼의 성적을 훨씬 뛰어넘는 수석 졸업이라는 영예를 안았고 감사의 인사를 하자 “지휘참모대학은 전술과 관리에 중점을 두고 군의 사기함양은 무시하고 있어. 부상자 명단에 올라 있는 얼간이들을 다시 싸우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솔직한 견해를 피력하기도 했다.
  “장차 전장에서의 승리는 계획 수렴이 아니라 오로지 과감한 실천력으로 좌우될 것이다.”
  패튼은 이와 같은 신념을 노트에 기재했다.


  이러한 패튼의 의견은 1918~1950년 사이에 미 육군에 형성되어 있던 일반적인 통념에 모순이 존재함을 잘 지적하고 있었는데 미국의 군사학자들은 향후 장차전에서 승리의 결정적인 요인은 기동공세에 있다고 정확하게 판단했다.
  원칙적으로 미 육군 교리의 핵심은 바로 병사 개개인의 능력과 전투의지, 즉 사기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포트 레븐워스에서 교육하는 내용의 근간이 되는 [ 전쟁원칙 ] 역시 인간에 의해 좌우되는 전장환경에나 적용될 법한 것이었는데 당시 미군 수뇌부 및 참모부서는 미국인이 적극적이고 지략이 풍부하며( ? ) 자신감이 충만하다고 판단했다.


  물론 오늘날 미국의 모습을 보자면 어느 정도 통용이 될 법했지만 당시 미군이 얼마나 개전 초반 독일군과 일본군에게 고전을 했는지를 고려한다면 이는 자신감의 충만이 아닌 일종의 오만방자함의 발로라고 봐도 무방했다.


  지루한 나날들


  포트 레븐워스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패튼 소령은 메사추세츠주 보스턴에 주둔한 군단 참모장교로 보직되었고 8개월 뒤 다시 하와이 오아후섬에 주둔한 하와이 사단( 훗날 미 제24, 25 보병사단의 모체 ) 참모장교로 전출되었다.
  이 곳에서는 그간 공부한 군사지식이 거의 쓸모가 없는 한가한 행정업무 위주였기에 현지 명사 및 외국인, 그리고 섬 주민들과 어울리며 요트를 타거나 현지 주둔부대에서 폐지시켰던 폴로 경기를 부활시키는 등 느긋한 나날만을 보냈다.


  1926년 11월, 사단 작전참모로 보직이 변경된 패튼은 부임과 동시에 “부대의 군기가 문란하고 훈련 수준이 너무 엉망이다.”라고 불평을 토로했다가 되려 장교들의 원성을 사는 사고( ? )를 쳤는데 훗날 여러 차례 말 실수, 그릇된 처신으로 점철된 그의 군생활을 보자면 이는 하나의 일화에 그칠 수도 있겠지만 덕분에 정보참모로 다시 보직되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이처럼 일반 보병사단에서 난감한 꼴을 당한 뒤 1928년 자신의 원래 병과인 기병감실로 전속된 패튼은 기병대의 기계화라는 난제에 직면했다.


  1927년, 패튼의 아버지가 타계하자 그는 깊은 슬픔에 가득 잠겨야만 했다. 더욱이 1931년 12월에는 그를 극진히 사랑해줬던 이모까지 임종을 맞았고 덕분에 주량이 늘어 과음을 하는 일이 잦게 되었다.
  자연 치아건강도 악화되었고 탈모까지 진행되는 형편이었다.


강철의 준마

 


  1931년 마침내 그 동안 프랑스제와 영국제 전차의 카피 생산품으로 만족해야 했던 미 육군에 드디어 최초의 기계화 부대가 편성되었다.
  비록 급격한 예산부족으로 인해 전차 1개 중대, 차량화 보병 1개 중대, 장갑차 1개 중대, 견인포 1개 포대로 총 병력이 700명도 안 되는 소규모였지만 그 전까지 이런 부대 편성 자체에 인색했던 미 육군의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실로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기병감실에 근무하며 점차적으로 입지가 좁혀지는 기병병과를 수호해야 하는 패튼 소령에게 있어 이 강철의 준마들은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하지만 기병감실에서 내려진 기계화 부대 대비 군마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패튼은 스스로 군마의 단점을 인증하는 실수를 벌였고 당시 세계적인 추세는 군마보다 이런 기갑전력을 그래도 더 좋게 봐주는 편이었다.
  더욱이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기병사단이 10~20대 이상의 장갑차를 어떻게든 확보하기 위해 노력한 점만 봐도 이제 더 이상 군마가 전장의 주역이 될 수 없을 만큼 전장 환경이 변화되고 있었다.
  이처럼 그야말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던 시기 패튼 소령은 다행히 육군대학에 입교해 업무 압박으로부터 잠시 해방될 수 있었다.


  1931년 1월, 패튼 소령은 [ 기병저널 ]에 “전쟁에서의 성공”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는 지식이 성공의 열쇠가 될 수 없으며 “승장[ 勝將 ]보다는 패장에게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계획수립을 잘한다 하여 이것이 최고의 해결책이 되는 게 아니다. 실제 남북전쟁 당시 챈슬러스빌 전투에서 북군의 후커 장군은 완벽하기 그지 없는 작전계획을 수립했지만 결과적으로 참담한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독일군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까지 충실한 작전계획과 준비를 갖췄지만 결과적으로 슐리펜 계획의 실패에 따른 전쟁의 장기화와 더불어 패전하고 말았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을 통해 패튼은 전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지휘관임을 강조했는데 우선 지휘관은 부사관 및 병사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존재여야 하며 살신성인의 자세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수양을 쌓아 갈고 닦는 것이라 확신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 지었는데 이것을 잘 이해한다면 앞으로 10년 동안 패튼이 인간적으로, 아니면 군인으로서 보여준 행동방식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살신성인( 殺身成仁 )의 자세만큼 중요한 것은 위-아래로 막힘이 없는 의사소통이다. 따라서 지휘자는 탁월한 배우가 되어야 한다. 즉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연기자가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을 달성한다면 비로소 한 명의 훌륭한 지휘관이 탄생하는 것이다.”
  1932년 육군대학을 졸업할 무렵의 패튼 소령은 이제 과거처럼 기병병과를 중시하지도, 그렇다고 전차병과를 반대하지도 않는 진정한 전장의 투사로 다시 태어나 있었다.


  그는 육군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강한 신념과 적극성을 지닌 유능한 장교”이며 “정부 기관에서 정무를 수행할 자격도 있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런 강점 덕분에 졸업 후 바로 포트 마이어에 주둔하고 있던 제3 기병연대의 부연대장으로 부임하는 쾌재를 누렸다.


  하지만 부임 이후 첫 임무는 1932년의 보너스 시위행진 진압으로 발단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퇴역장병에게 소액의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의회에서 의결이 되었음에도 조기지급을 요구하는 바람에 의사당 앞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의 전우 르노 FT-17 경전차와 기병들을 동원해 시위대를 진압해야 했다.


  이런 방식은 패튼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더욱이 이 날 시위대 속에는 뫼즈-아르곤 공세 당시 부상을 입은 자신을 부축한 하사까지 끼어있어 그의 속을 긁어놓았다.
  다음 날 아침, 그 예비역 하사가 자신을 찾아오자 패튼은 처음에는 모른 척 했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고 그를 도왔다.
  육군본부에 배치되어 있던 아이젠하워 소령 역시 시위대를 동정했지만 패튼과 제3 기병연대의 장교들은 더욱 복잡한 심경이었다.


중령 진급 이후


  1929년 미국을 파국으로 몰아갔던 대공황이 북미를 휩쓸었다. 당시 부자였던 패튼 집안은 대공황의 여파를 거의 받지 않았고 수입은 견실한 곳에 투자돼 경기가 바닥을 칠 때도 배당금이 지속적으로 나와 금전적으로 힘든 일이 없었다.
  덕분에 패튼은 의원과 정부 고관, 그리고 장교들을 대대적으로 초대해 수렵대회를 개최하는 한편 야외에서 소 한 마리를 통째로 구워 무려 2,500여명의 손님을 접대하는 재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1934년 6월에는 패튼의 장녀 베아트리스 스미스 패튼( 1915~1952 )이 육군 장교인 존 나이트 워터스( 1906~1989 )와 결혼하는 경사가 있었고 1938년 4월에는 장손 존 나이트 워터스 주니어가 태어났다.
  그리고 1935년 3월, 마침내 패튼은 중령으로 진급했다.
  평시 계급으로 돌아온 뒤 14년 만에 복귀였지만 이미 50을 바라보는 그로서는 기쁨 못잖게 초조함도 가득했다.


  하지만 중령 진급 이후 첫 부임지인 하와이에 도착하자 그간의 패튼은 온데간데 없고 그는 범선을 구입해 항해를 즐기는 등 활기찬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후 실시한 하계 기동훈련에서 그는 창의성, 융통성, 그리고 상상력마저 없는 형편없는 수준이라는 신랄한 비판으로 가득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패튼은 지휘 통신수단이 적절치 못하고 차량 정비 유지에 인력과 장비가 낭비되며 훈련환경이 형편없다고 거침없기 기재해 갓 부임한 새내기 영관장교가 할 짓이 아니었고 이전처럼 다시금 적들만 잔뜩 양산해내는 결과를 낳았다.


  더욱이 이 시기 패튼의 행동은 거의 위험수위에 이를 정도로 부대 내에서의 업무는 둘째치고 그가 심혈을 기울여 인맥을 구축해오던 사교모임이나 폴로 경기장에서 보여준 돌발행동은 이미 상식적인 수준을 넘어선 뒤였다.
  주위에서 이를 말릴 수도 없는 지경이었는데 특히 나이가 든 숙련된 선수들은 폴로 경기장에서 힘 대신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한 노련미를 선보이는 반면 패튼은 오로지 힘에만 의존했다.
  한 번은 경기에 몰입하던 중 무리를 하는 바람에서 낙마해 머리를 심하게 다치기도 했는데 군의관이 가벼운 뇌진탕이라는 진단을 내렸음에도 패튼은 이를 무시하고 다시 평상시처럼 행동하다가 3일 만에 일시적인 기억상실증과 건망증에 걸려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이후 개최된 하와이 폴로 선수권대회에서는 그야말로 진상에 가까운 추태를 벌이는 바람에 시합을 관전 중이던 하와이 육군 사령관 드럼 소장에게 호출돼 엄하게 질타를 당하기까지 했다.
  드럼 소장은 신분이 미천한 집안 출신인데다 성격까지 까다로웠기 때문에 패튼 중령과 시시각각 충돌하기 직전이었고 이 날 보여준 추태는 그런 장군을 폭발하게 하기 충분했던 것이다.
  덕분에 패튼의 신경질은 점점 심해졌고 상냥하고 밝은 미소를 잃지 않던 모습을 도무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성적 추문

 

  하와이에 근무할 당시 패튼은 아직 출가하지 않은 루스 엘렌 패튼과 1923년 12월 23일에 태어난 아들 조지 스미스 패튼 Ⅲ세와 같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자연스레 주당이 되어버린 아버지를 딸과 아들은 멀리하게 되었고 아내 베아트리스 아이어는 숫제 연애소설을 집필할 지경이 되었다.
  이 때 집필한 소설은 여전히 읽히고 있을 정도로 그런 아내를 바라보는 패튼은 “시간이 아주 남아도는구려”라는 푸념만 늘어놓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주당은 양반이라 할 정도로 엄청난 추문이 발생하니 바로 베아트리스 아이어의 조카딸인 고든이 극동아시아 여행길 중 하와이에 들른 것이 화근이었다.


  현대적이고 매혹적인 미혼 여성이었던 고든은 “이상형을 찾았지만 이미 다른 여성의 소유로군요”라며 패튼에게 접근했고 뇌진탕 부상의 후유증과 술에 쩔어있던 그는 자제력을 잃고 정말 어처구니없는 작태를 저지르고 말았다.


  훗날 빌 클린턴-모니카 르윈스키 추문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화려한 스캔들이 벌어진 셈이었고 패튼 집안에서는 이 민망한 일을 일체 함구했다.
  결국 고든은 부두에서 손을 흔들며 환송하는 패튼과 작별한 뒤 다시 여행길에 올랐고 아버지의 외도에 분개한 루스 엘렌 패튼은 당시 상황을 일기에 기재했다.


  “어머니는 유대인의 속담에 있듯 ‘외도는 두뇌로 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고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 훌륭하고 믿음직한 남성조차도 한 때는 눈이 멀어 발을 헛디딜 수 있단다. 나는 아빠하고 헤어지지 않을 것이란다. 아빠에게는 엄마 밖에 없고 엄마는 아빠를 사랑하니까]”
  이후 패튼은 정신을 차린 뒤 과거의 실수를 만회하고자 노력을 다했고 실행하는 일은 무엇이든 효과가 있었다.
  베아트리스 아이어는 원래대로라면 당장 이혼할 수 있었지만 패튼은 군 내외로 너무 유명한 인사였고 실행한다해도 아이어 집안의 평판이 추락할 여지가 있었다.


  덕분에 그는 힐러리 클린턴처럼 남편의 외도를 용서해야 하는 딱한 처지가 되었지만 그런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 패튼은 정성을 기울였다.
  특히 집 내-외부에서의 언행을 매우 조심했고 1937년 6월, 포트 라일리의 미 육군 기병학교로 부임하며 다시금 재기하는데 성공했다.


  새로운 주둔지로 떠나기 전 패튼은 정식 휴가를 받아 메사추세츠 주의 가족 별장에서 여가를 보냈는데 하필 베아트리스 아이어가 탄 말이 패튼의 다리를 걷어차는 바람에 부상을 입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당장 안정을 취해야 하는 입장이 된 패튼 중령은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말을 목발로 두들겨 패려다 되려 아내의 분노를 사 그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기 일보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어느 정도 부상이 안정되자 1938년 2월, 패튼 중령은 기병학교 교관 겸 제9 기병연대 부연대장 보직을 겸직한 상태로 첫 출근했다.
  포트 라일리에서의 근무 중 패튼은 다시금 쾌활한 모습을 되찾았고 동료 장교들과의 사이도 원만했다.


  1938년 5월, 패튼은 마침내 대령으로 진급해 텍사스주의 제5 기병연대장으로 부임했고 베아트리스 아이어에게 축하 회식에서 맥주만 마시니 안심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지만 정작 고주망태가 되도록 과음하는 바람에 부하들이 관사까지 부축해줘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
  그는 다시금 멕시코 국경지대로 투입돼 산적들을 소탕하는 꿈을 꾸며 부대를 혹독하게 훈련시켰지만 11월, 다시 제3 기병연대장으로 전출되며 실망감만 드러냈다.

 

show me the money!

 

  이는 돈 때문이었는데 당시 제3 기병연대장은 돈이 없으면 자리를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출이 많은 보직이었다.
  지역 유지 및 명사, 의원, 장교들과 숱한 회식과 파티를 벌여야 했으니 미 육군 대령 월급과 연대장 수당으로 이를 감당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졸지에 전임 연대장이 빚더미에 오르자 오직 재력이 풍부한 패튼 대령이 졸지에 적임자로 떠오른 것!


  덕분에 육군본부 인사과는 패튼 대령을 그 자리에 앉혀 더는 빚쟁이 대령이 양산되는 것을 막고자 했고 그 대가로 차후 준장 진급 대상자에 우선적으로 배정해주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야전으로 나가고 싶어했던 당사자는 기분이 완전히 상한 상태였다.
  그리고 겨우 겨우 외도로 인한 이혼 위기에서 벗어났던 베아트리스 아이어의 재력이 분노 표출 대상이 되어버렸다.


  자신의 돈 때문에 후방으로 전출되었다고 짜증을 내는 패튼 대령의 어처구니 없는 행동에 베아트리스 아이어는 어이가 없었지만 바른 교육을 받고 커온 성장환경 때문에 그저 묵묵하게 있을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아마 일반적인 한국인 부인이었다면 당장 궁중 볶음팬을 휘둘렀겠지만 )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었다. 제3 기병연대장으로서 패튼 대령은 각종 의장행사를 정열적으로 지휘했고 야전 지휘관 보직을 노리며 때를 기다렸다.


  1939년 7월, 마샬 대장이 신임 육군참모총장으로 부임했지만 마침 총장 공관 공사가 완료되지 않자 패튼 대령은 재빨리 자신의 숙소로 모시겠다는 급제안을 했다.
  그는 우쭐대는 문체로 베아트리스 아이어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단 내 매력을 자연스럽게 보여줄 기회가 될 것이오. 퍼싱이나 다른 장성들의 추천서가 필요할 것 같지는 않구려.”


  마샬 참모총장은 부임과 동시에 너무나도 고령화된 미 육군 장교단의 정리에 착수했다.
  문제는 이 때 54세로 사실상 계급정년에 가까운 패튼 역시 예편을 할 위기였다는 점인데 때마침 마샬 대장이 승마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는 것을 파악한 그는 아침마다 그의 말안장을 얹기 시작했다.
  마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의 신발과 베개를 가슴에 품어 지극정성으로 섬긴 끝에 치쿠젠노카미의 지위에 올라 간파쿠 직위까지 치고 올라가는 계기가 되듯 패튼의 노력 역시 만만치 않았던 것.


  사실 마샬은 참모총장 취임 전부터 패튼에게 주목을 해오고 있었는데 프랑스에서 보여준 저돌성과 이후 꾸준히 발표한 논문을 꼼꼼히 읽어보았던 것!
  패튼은 마샬 참모총장 외에도 그의 가족들과도 매우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그의 양녀와 사이가 돈독했다.
  마샬 참모총장은 수준 높은 교육 환경을 조성하는 한편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통해 활약한 전차의 가능성을 주시했다.
  한편으로 패튼을 이름으로만 불렀는데 이는 그의 성격이 여전히 참모총장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탓이 컸다.

 


  패튼의 성격은 그야말로 독불장군에 가까웠고 주위 동료들과의 원만한 융합조차 쉽지 않았다.
  마샬 참모총장이 그의 열정을 높이 사면서도 한편으로 이런 철없어 보이는 면모에 대한 걱정이 컸던 탓에 원래대로라면 그대로 예편할 수 있었을 패튼이었지만 당장 제대로 된 장교가 극히 부족했던 미 육군의 사정상 함부로 내칠 수조차 없었다.


  여기에는 비록 성격이 좀 문제지만 부여된 임무를 반드시 완수해낼 것이며 어떠한 역경도 잘 극복해낼 것이라는 마샬 참모총장의 믿음이 크게 작용했다.
  마샬 참모총장은 자신의 참모장교에게 “패튼은 육군 내에서 제일가는 전차장교니 T/O가 생기면 기갑군단장으로 임명하는 게 어떻겠나?”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2019년 12월04일 19시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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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림스톤 공대지 미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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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디펜스 타임즈 2020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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